[한라일보] 만덕양조장을 찾는 방문객이 부쩍 늘었다. 지난 주말에도 서울에서 내려온 지인들에게 만덕양조장을 안내하고, 금산물 공원을 거쳐 재단장한 김만덕 객주를 찾았다. 봄바람 솔솔 부는 초가 마루에 앉아 고기국수에 파전을 안주 삼아 마시는 한잔 막걸리 맛은 일품이었다. 마을공동체 사업으로 만덕양조장을 시작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주정공장 얘기로 옮아갔다. 내친김에 주정공장수용소 4·3 역사관에 들렸다.
작년 3월 증언과 정황만 남은 제주주정공장은 '주정공장수용소 4·3역사관'이라는 새 이름을 붙여 개관했다. 아픈 역사가 어떻게 도민들을 마주할지 내심 기대가 컸었다, 하지만 "역사가 안 보인다, 장소성이 부족하다, 콘텐츠는 없고, 성의 없는 전시 기획"이라고 여론의 혹평을 받았다. 4월에만 반짝 문전성시를 이룰 뿐, 4·3 역사관은 한산했다. 개관 1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채워야 할 것이 많은데, 빈자리가 커 보였다.
4·3 역사관을 둘러보고 일제 진지동굴이 있는 사라봉 길을 걷는데 한 지인이 주정공장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왔다. 역사관 한쪽 벽에 걸려있는 흑백사진 몇 장과 설명만으로는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역사적 장소를 이해하는 데 역부족한 눈치였다.
제주주정공장은 1943년 동양척식주식회사가 건입동 현재 제주항 여객터미널 맞은편 일대에 세웠다. 태평양전쟁 당시 속칭 빼떼기로 불리는 절간고구마를 원료로 무수주정 알코올을 생산했다. 일제 침략기 강제노역과 수탈의 공간, 주정공장은 해방 이후 제주 최대 근대 산업 시설이었다. 제주 4·3 시기, 예비검속 당시에는 집단 수용소로 사용되었고, 2001년부터는 4·3 행방불명 희생자 진혼제가 봉행 되기도 했다.
2001년 발행된 건입동지에 따르면 주정공장 굴뚝 높이만 50m에 달했다. 주정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나야 제주 경제가 돌아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발전기를 갖춰 시내 전력 공급을 담당하기도 했다. 특히 소주제조용 주정을 전국에 공급했고, 자체적으로 소주 생산도 하면서 애주가들 사이에서 '만수주'라는 권주가가 보급될 정도였다. 그만큼 주정공장은 제주 경제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989년 5월 12일 주정공장의 상징처럼 서 있던 굴뚝은 해체되었다. 굴뚝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주정공장은 제주의 역사적 유산이면서, 건입동 마을의 정신적 자산이다. 그럼에도 주정공장에 주민이 주인이었던 적은 없었다. 역사관 조성과 운영과정에도 마을과의 연계나 협업은 전무했다. 새 역사관이 마을과 주민을 객체로 전락시켜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안타깝다.
한 강연회에서 주정공장을 두고 "4·3 말고도 기억해야 할 역사가 있다"는 원로 사회학자의 지적처럼 과거의 유산을 원도심 활성화를 위한 자산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할 일이 많다. 행정만 탓하기 이전에 마을 차원에서 역사적 공간을 재해석하고, 마을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기 위한 주민의 주체적 역할을 고민해야 할 때다. <김명범 행정학박사·제주공공문제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