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김만일(金萬鎰, 1550~1632)은 정의현 의귀리 출신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594년 군마 500필을 헌납하여 국난 극복에 공헌했다. 이후에도 1600년(선조 33), 1620년(광해 12), 1627년(인조 5)에 1300여 필의 말을 나라에 바친 공이 크다.
만일 공은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려고 전쟁 수행에 꼭 필요한 군마(軍馬)를 자진하여 바쳤다. 이 공로로 1620년 정2품 '오위도총부도총관'에 1628년, 종1품 '숭정대부'에 제수되었다.
광해가 김만일에 벼슬을 내리자, "바다 가운데 후미지게 위치한 섬에 사는 일개 말 장사꾼에 불과한 백성에게 분수에 벗어나는 벼슬로 대우하니 사람들이 모두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다"라며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거세게 반발했다.
임란발발 보름 만에 의주를 도망간 국왕 대신 세자가 의병들과 함께 왜군에 맞서 죽을힘을 다해 나라를 지켜냈다. 이를 계기로 무능과 무책임의 아이콘 선조는 광해를 세자가 아닌 군주 자리를 위협하는 존재로 여겼다. 이로 인해 당시 사헌부와 사간원은 물론 사관(史官)조차, 광해군을 어떻게든 깎아내리려 했다. 광해의 각별한 보호를 받았던 김만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에게 모함과 박해로 고초를 겪게 하였으며 석연찮은 죽음에 이르게 한 이들이 벌인 일이다.
국난발발 보름 만에 백성과 도성을 버린 채 여차하면 중국으로 망명하려고 의주로 옮긴 국왕과 그의 신하들은 도대체! 군주를 대신해 동분서주, 살신성인하며 겨우 나라를 구한 세자 광해, 해전에서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이순신, 율곡의 '십만양병설'처럼 단지 생각에만 그치지 않고 실제 당시 육상전 핵심 전력인 말을 나라에 헌납한 김만일, 등에게 어떤 마음이었을까?
결코, 이성적이지 않았다. 국난을 이겨내 민심을 얻은 세자를 시기·견제함은 물론, 구국의 성웅을 갖은 모함과 박해로 관직 박탈하며 온갖 수모를 안겼다. 하물며 유배의 섬에서 말이나 키우던 하찮은 백성 김만일 정도야.
요즘 '제주도로 갈 바엔 그 돈으로 일본으로 가겠다는 사람이 늘어났다'라는 기사를 자주 본다. 관광지 고물가와 '바가지'를 빗대어 나온 말이지만, 이 대목에서 묘한 기시감이 든다. 그 후손이라면 제주에 오기 싫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동네 심방 안 알아준다"라는 제주 속담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밉다"라는 시집살이 설움을 말하고 있다.
역사적 상상력, 스토리텔링 운운하며 과장·미화·왜곡 말고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승정원일기' 등에 기록된 사실(史實)을 기본으로 김만일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정립하여야 한다. 먼 탐라도에서 말이나 키우던 평범한 제주 사람이 도망친 양반보다 더 국난 극복에 공헌했다는'변방의 역사'를 도민이 나서 체계화해야 한다. 이를 콘텐츠화해 확대 보급하는 일은 그다음이다. <진관훈 제주문화유산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