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국내 최초의 장르 영화제를 표방하며 출발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어느덧 28회째를 맞았다. 30년 가까이 세계의 온갖 장르 영화를 선보인 이 영화제는 늘 한여름의 폭염과 장마 기간에 맞물려 펼쳐진다. 가을 바다가 있는 부산도 아니고 한옥 마을을 산책할 수 있는 봄의 전주도 아닌 아파트로 둘러 쌓인 베드타운 부천의 여름은 늘 뜨겁거나 축축하다. 부천을 찾은 관객들은 상기된 얼굴로 물에 젖은 우산을 빠르게 털며 종종 걸음으로 상영관으로 입장하고 극도의 습기를 한순간 날리는 냉기에 혹은 스크린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에 흔쾌히 몸을 맡긴다. 바다를 보러 가거나 산책을 하러 갈 필요 없이 하루 종일 캄캄한 상영관의 스크린에 펼쳐지는 다채로운 장르의 향연에 몸을 맡긴 뒤 밖으로 나오면 오색찬란한 도심의 야경이 펼쳐진다. 그야말로 본격 여름 도심 영화제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작품들은 국내의 다른 국제영화제와는 다른 매력을 갖고 있다. 그 중 가장 큰 매력은 뭐니뭐니해도 이 작품을 부천에서 보지 못하면 극장에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 물론 전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수상한, 작품성과 대중성을 갖춘 작품들도 여러 편 소개되지만 부천만의 특별한 매력은 역시 장르 영화의 마니아 층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얻어낼 '작고 위험하며 엉뚱하고 이상한' 작품들이 포진해 있다는 것이다. 기발한 상상력으로 무장한, 눈치 보지 않는 표현으로 채색된, 거침없이 분방한 아이디어로 속도를 올리는 부천의 작품들은 범상함을 거부하는 짜릿한 매력으로 영화제 팬들의 비명과 탄성을 얻어왔다.
올해 부천의 화제작 중 한 편이었던 [비버 대소동]역시 부천만의 매력으로 중무장한 작품이었다. 언뜻 아동용 애니메이션을 연상시키게 하는 제목, 옛날 영화처럼 느껴지는 흑백의 스틸만을 보고서는 도무지 어떤 내용일지 종 잡기가 어려웠는데 역시나 영화는 오프닝부터 엔딩까지 관객들의 섣부른 예단을 온 힘으로 밀어내는 과연 부천다운 작품이었다. 마치 산 꼭대기에서 굴러 가기 시작한 작은 눈덩이가 예상치 못한 협곡들을 지나 도무지 짐작할 수 없던 형상으로 완성되는 것을 목격하는 듯한 놀라운 경험을 주는 작품이 [비버 대소동]이다. 이 작품은 흑백의 무성 영화다. 대사는 전체 분량의 10퍼센트도 채 되지 않고 등장 인물들 또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다. 대신 토끼와 비버, 너구리와 개 등 다양한 동물들이 등장한다. 인형 코스튬을 뒤집어 쓰고 사람이 연기한 이 캐릭터들의 천연덕스러운 매력이 압권이다.
사과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한 남자가 자신의 농장이 파괴되는 것을 목격하고 복수의 여정을 떠난다. 그 남자는 한 겨울 동안 생존을 위해 사냥과 낚시로 고군분투하며 지낸 후 한 상인을 만나게 되고, 그 상인은 남자에게 수백 마리의 비버 사체를 가져오면 자신의 아름다운 딸과 결혼을 허락하겠다고 약속한다. 이로 인해 남자는 터무니없는 사냥을 위해 먼 길을 떠난다. 영화제 프로그램 노트에 있는 [비버 대소동]의 줄거리다. 동화를 연상시키는 이 내용은 마이크 체슬릭 감독과 주연 배우 라이랜드 브릭슨 콜 트위즈의 천연덕스러운 시너지 덕에 동화 이상의 결과물로 만들어졌다. 흑백의 스크린을 화폭처럼 사용하는 영화는 저예산으로 제작된 작품의 규모적 한계를 아이디어로 끊임없이 돌파한다. 영화 속 많은 장면들이 마치 현대 미술의 영역을 넘나들 듯 자유롭고 인상적인 이미지들을 다채롭게 선보이고 슬랩스틱 코미디로 구현된 한 남자의 기상천외한 생존기는 어느 순간 관객들을 북미의 설원으로 함께 데려다 놓는 마법을 부린다.
영화를 보는 부천의 상영관은 빈 자리 없이 가득찬 관객들의 감탄과 웃음으로 내내 들썩였다. 상영이 종료된 이후 뜨거운 박수가 나왔고 관객과의 대화를 위해 영화 속 인형 코스튬을 한 캐릭터가 주연 배우와 함께 등장하자 환호가 이어졌다. 산뜻한 포만감을 안고 상영관을 나오니 비를 잔뜩 먹은 먹구름이 부천의 스카이라인을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는데 어쩐지 언제 쏟아질 지 모를 저 비가 당장 쏟아져도 이상하게 괜찮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상해도 괜찮아'라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슬로건처럼 영화제에서 비 맞고 웃으며 달리는 사람이 되는 것도, 옆을 보니 또 다른 그런 사람을 마주하는 것도 다 괜찮을 것 같다는, 여기가 아니면 어디에서라는 마음으로.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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