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훈의 한라시론] 나팔꽃 피는 아침

[김양훈의 한라시론] 나팔꽃 피는 아침
  • 입력 : 2024. 07.17(수) 22:00
  • 송문혁 기자 smhg1218@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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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삼복더위에 장마철이라 잠을 설치기가 십상이다. 올여름의 불면은 날씨 탓만은 아니다. 이 나라 정치 기상도가 날이 갈수록 국민의 숨을 막히게 해서다. 제주의 사위 유시민 작가는 지금 대한민국은 '윤석열이라는 병'을 앓고 있다고 단언했다.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다. 이 '병'을 진단하고 처방을 내놓기 위해 쓴 책의 제목은 '그의 운명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생각'이다.

무더위든 정치 탓이든 새벽잠을 설친 이들은 이불을 박차고 현관문을 나서야 한다. 여명(黎明)의 맑고 시원한 새벽공기는 정신과 몸 건강에 좋은 명약이다. 그 시각 갓 만개한 나팔꽃을 감상하는 재미는 덤이다.

올봄 꽃밭을 새로 꾸미고 화단 언저리에 나팔꽃을 가득 심었다. 덩굴손이 허공에서 헤매지 않도록 마른 대나무며 가지치기하고 버린 나무줄기를 주워다 그들 곁에 꽂아 주었다. 지나는 이웃들은 웬 늙은이가 소꿉놀이를 하나 했을 터이지만, 나는 나팔꽃을 좋아해서 매해 친구로 삼는다. 꽃밭의 자갈투성이 빈 구석 자리를 가득 메워주는 그들의 부지런한 모습을 시인 송수권은 그의 시 '나팔꽃'에서 이렇게 그렸다.

바지랑대 끝 더는 꼬일 것이 없어서 끝이다 끝 하고/다음 날 아침에 나가보면 나팔꽃 줄기는 허공에 두 뼘은 더 자라서/꼬여 있는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아침 구름 두어 점, 이슬 몇 방울/더 움직이는 바지랑대는 없을 것이었다/그런데도 다음 날 아침에 나가보면 덩굴손까지 흘러나와/허공을 감아쥐고 바지랑대를 찾고 있는 것이다./이젠 포기하고 되돌아올 때도 되었거니 하고/다음 날 아침에 나가보면 가냘픈 줄기에 두세 개의 종까지 매어 달고는/아침 하늘에다 은은한 종소리를 퍼내고 있는 것이다/이젠 더 꼬일 것이 없다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우리의 아픔도 더 한번 길게 꼬여서 푸른 종소리는 나는 법일까.(송수권의 시 '나팔꽃' 전문)

세상에 꽃을 피워내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일까? 꽃망울을 열기 위해 나팔꽃은 어둠에 잠긴 새벽 3시부터 부지런하다. 효자 지팡이를 짚고 매일 새벽 산책을 나오는 이웃 할머니가 나팔꽃과 눈인사를 나누는 5시면 꽃은 활짝 피어난다. 이로부터 한낮의 열기가 시작하는 시각까지 대여섯 시간이 그들이 갖는 아침의 영광이다.

나팔꽃에도 애먼 수난이 있었다. 한번은 익명의 이웃이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민원을 넣었다. 나팔꽃 줄기 때문에 나무가 말라 죽게 생겼으니 조치하라는 것이었다. 너무 어처구니없어 속으로 이런 생각까지 하였다. '왼쪽으로 감겨 오르는 좌익의 덩굴손과 붉은 꽃을 가졌기 때문일까?' 민원의 소리를 전하는 관리사무소 직원에게 나의 답은 제주4·3의 영웅 문형순 서장의 그것이었다. 부당함으로 불이행!

허공을 헤매면서도 끝내 바지랑대를 감아쥐는 나팔꽃의 열정을 바라보며 은은한 종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은근과 끈기, 조윤제 선생이 말한 우리 민족의 아름다움이며 힘이다. 다시 도진 고약한 이 병마와 싸워서 우린 그 끝을 볼 것이다. <김양훈 프리랜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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