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영의 건강&생활] 집으로 가는 길

[이소영의 건강&생활] 집으로 가는 길
  • 입력 : 2024. 12.18(수) 06:00
  • 고성현 기자 kss0817@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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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미국 고속도로들은 번호가 붙어 있는데, 그중에 95번 고속도로가 있다. 미국의 동해안을 따라 남쪽 끝 마이애미부터 북쪽 끝 캐나다 국경까지 3000㎞ 정도를 잇는 도로다. 보스턴, 뉴욕, 볼티모어, 워싱턴디시 같은 동부의 큰 도시들이 다 이 길 위에 있다. 운전하다 가끔 이 고속도로를 탈 때면 '이대로 쭉 달리면 내가 살던 그곳이 나오겠구나!' 하는 생각에 설레기도, 그리워지기도 한다.

95번 도로보다 더더욱 오랜 집으로 가는 길은 한국행 비행기다. 얼마 전 한국에 다녀왔는데 공항에서 탄 택시 기사 아저씨부터 가까운 친지들까지, 내 국적이 아직 한국이라는 걸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미국에 온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고 여기서 일도 하고 가족도 있으니 당연히 국적을 바꾸었으리라 짐작한 것 같다. 나도 가끔 '내가 이민 을 온 셈인가? 그렇다면 내가 재외동포라고?'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하지만 어쩐지 그런 말들은 아직도 너무 낯설게 느껴진다.

지난달에는 미국 대선이 있었다. 어느 때보다 성숙하지 못한 비방과 혐오가 극심한 선거였다. 정신과에 내원하는 환자들은 물론, 동료들, 다양한 배경의 이웃과 친구들까지 모두가 스트레스, 불안을 호소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미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으므로 이곳에서 투표권이 없지만, 나와 내 가족이 정착해 살아가는 곳이기에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한국에서 보낸 일주일은 눈코 뜰 새 없었지만 즐거웠다. 학술 발표를 두 번 하고, 가족 행사에 참석했다. 예전에 자주 보던, 하지만 이젠 몇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얼굴들을 보고, 한국 음식을 먹고, 마트에 가고, 서점에서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샀다. 무엇보다, 연로하신 할머니가 건강히 계신 모습을 뵈어 기뻤다. 서울도, 제주도 참 좋았다.

행복한 기분으로 미국으로 돌아온 다음 날, 계엄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미국에서도 4년 전 국회의사당이 공격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때의 충격이 겹쳐 보였다. 장난이겠거니 생각한 그 소식은 진짜였고, 그 뒤로는 모든 일이 숨 가쁘게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대한민국에 있지 않기에 그 불안, 분노, 저항의 에너지를 직접 느낄 수는 없다. 미국에서 듣는 한국 소식은 이스라엘이나 우크라이나의 전쟁 소식을 다루는 뉴스의 톤이다. 사실을 뭉뚱그려 전달하고 있지만, 그 혼란과 절망의 규모와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나의 집은 어딜까? 오래도록 의문을 가졌는데 지금 나의 대답은 '모두 다'다. 내가 살았고 사랑하는 모든 곳이 내 고향이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다 나의 일이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에 관한 일이다. 이 혼란한 시기에 모든 분이 안전하길 바라고, 곧 안정을 찾고, 안심할 수 있는 시간이 오길 바란다. <이소영 하버드대 메스제너럴브리검 정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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