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역사현장' 일제전적지를 가다](112)

['고난의 역사현장' 일제전적지를 가다](112)
제3부 : 군사요새로 신음하는 제주 - 44
4) 108여단 주둔지 ⑤안돌오름·밧돌오름
  • 입력 : 2008. 08.07(목) 00:00
  • 이윤형기자 yhlee@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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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밧돌오름 갱도진지 내부에 빠져 죽은 소의 뼈가 앙상하게 남아있다.

남동사면 일대서 갱도 10여 곳 찾아내
병력 주둔 및 관측에 유리한 입지조건


오름 왕국 제주에서 백미로 꼽히는 지역이 바로 구좌읍 송당 일대의 오름들이다. 송당리에 소재한 오름만도 25곳이나 된다. 이들은 하나같이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오름들이다. 오름에는 태평양전쟁 시기 제주 주둔 일본군이 만든 많은 갱도진지 등이 만들어져 있어 역사의 아픔을 보여준다. 밧돌오름(外石岳·표고 352.8m)도 그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밧돌오름은 안돌오름과 쌍둥이처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밧돌오름의 갱도진지는 안돌오름을 마주하는 남쪽에서부터 동쪽과 북쪽 방면에 걸쳐 있다. 정상부와 분화구 안쪽에서도 확인된다. 취재팀이 밧돌오름에서 찾아낸 일본군 진지는 10여 곳에 이른다.

가운데 취재팀의 눈길을 끈 것은 정상부에 있는 관통형 갱도진지다. 이 갱도진지는 정상부의 평탄지형 지하를 동-서 방면으로 파들어간 형태다. 길이는 12m 정도의 소형으로 일자형으로 만들어졌다. 내부는 거의 암반층으로 돼 있다. 이 일대의 갱도진지가 대부분 송이층을 뚫고 만들어진 것과는 대조적이다. 동쪽 입구는 자연암반을 이용해서 쉽게 노출되지 않도록 만들어진 상태다. 중간 지점은 폭이 매우 좁아져 있어 진입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내부는 죽 연결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쪽 입구는 거의 막혀 있다.

이곳에서는 송당 일대의 오름 대부분을 볼 수 있다. 얼핏 꼽을 수 있는 오름만도 체오름 거친오름 거문오름 부대오름 부소오름 거슨새미오름 민오름 아부오름 높은오름 당오름 다랑쉬오름 등등이다. 그야말로 사방을 관측하기에는 더할 나위없는 천혜의 요지인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정상부의 관통형 갱도도 관측을 위한 용도로 구축된 것으로 보인다.

▲밧돌오름 정상부에 관통형으로 구축된 일본군 갱도진지 내부(사진 위). 오름 동쪽사면에 있는 갱도진지 내부를 조사하는 모습. /사진=이승철기자

이어 취재팀은 오름 동남 사면 7부 능선 지점에서 또 하나의 갱도를 찾아냈다. 이 갱도는 10m 정도의 진입부를 지나면 왼쪽으로 꺾인 형태다. 기역(ㄱ)자를 뒤집은 형태로 구축됐다. 내부에는 조그만 공간이 하나 있으나 거의 허물어졌다. 또한 갱도 벽면에는 갱목홈 3개가 뚜렷하게 남아있다. 갱도는 송이층을 뚫고 만들어졌다. 끝부분이 함몰돼 있는 것으로 볼 때 오름 사면과 연결됐다가 입구가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 갱도 입구에서는 당오름과 높은오름 아부오름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곳서 20여m 떨어진 지점에서는 또하나의 소규모 갱도를 찾을 수 있다. 내부는 진입하자마자 끝부분이 무너져 내린 상태다. 갱도 내부에 빠진 소가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했는지 앙상하게 뼈만 남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좁고 어두컴컴한 갱도는 한번 들어가면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죽음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근처에서는 무너져 내린 갱도 등이 추가로 확인됐다. 입구 쪽에 쌓인 송이층과 무너진 정도로 봤을 때 원래 규모는 상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입구 부분이 진입하기가 위험할 정도로 무너져 있어 내부 상태는 확인하기가 힘들다.

이처럼 밧돌오름에 많은 일본군 갱도진지가 구축된 이유는 무엇일까.

오름 분화구 내부에는 우물 2곳이 남아있다. 이 가운데 위쪽에 위치한 우물은 바닥이 일부 메워지고 물도 말라버린 상태다. 하지만 아래쪽 우물은 아주 양호한 상태로 남아있다. 현무암으로 석축을 공들여 쌓아올린 우물은 지금도 단장만 하면 이용할 수 있을 정도다. 이처럼 밧돌오름은 오름이면서도 풍부한 음용수를 간직하고 있는데다 병력 주둔과 관측에 유리한 입지조건을 지녔다. 밧돌오름은 안돌오름과 마찬가지로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군 '주저항진지'의 하나로 나타난다. 취재팀이 확인한 갱도진지 등은 일본군 주둔실태를 보여주는 흔적들이다.

/특별취재팀=이윤형·표성준·이승철기자



[탐사 포커스]독립혼성 제108여단

1945년 4월 제주 이동 동부지역 곳곳에 주둔

제주 동부지역 일대에 주둔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독립혼성 제108여단은 총병력 6천명 규모다. 여단사령부 및 보병 6개 대대와 공병대 포병대 통신대 등으로 구성됐으며, 그 예하에는 제2독립작정소대 등이 있다.

'스이(翠)'부대라 불린 108여단의 제주 진출은 1945년 4월16일 무렵 이뤄졌다. 이 때 제주항과 서귀포항을 통해 각각 병력 1천6백42명과 1천5백91명이 들어온다. 일본군 기밀전보문에는 1945년 7월 구좌읍 송당리에 108여단이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예하 부대 이동 및 배치상황을 보면 1945년 8월1일자로 동부 및 남부지구에 각각 1개 대대 병력이 배치된다. 이는 교래비행장 등을 엄호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108여단 주력 5개 대대가 한경면 청수리 일대로 이동한 걸로 나타나고 있으나 실제 이동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종전 무렵의 배치도에는 보병 제644대대는 조천읍 함덕, 643, 645대대는 각각 김녕과 표선지역에 주둔하며, 647대대는 구좌읍 하도 일대에, 성산 지역에는 642대대가 주둔했다.

/이윤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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