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0년경 한라산을 배경으로 한 '방선문' 그림(19×27㎝).
4백년 전 제주판관 김치 첫 기록·조선 선비들 미의식 공유 현장
일제강점기 나들이 장소… 1920년대 후 연료용으로 무차별 벌목
# 장소의 기억
사람과 달리 '장소'는 무수한 기억을 머금은 저장고다. 하지만 그 장소의 기억을 소생시키는 것은 사람들에 의해 전해지는 말이나 그 땅을 밟은 사람들의 기록 또는 흔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아무리 무수한 말과 흔적일지라도 그 장소가 겪으며 헤쳐 간 모든 것을 일일이 전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내게는 항간에 떠도는 '(인간에 의한) 기억의 장소'라는 말보다는 '장소의 기억'이라는 표현이 더 의미심장하다. 제주의 '방선문(訪仙門)'은 바로 이러한 생각을 하게 하는 장소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곳을 제주의 그 어떤 곳보다 좋아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찾고, 그때마다 이 바위 저 바위에서 미처 볼 수 없었던 선인들의 이름이나, 자연의 위대함을 새롭게 발견한다.
며칠 전 방선문을 다시 찾았다. 제주시내에서 한라산 방향으로 두어 개의 번잡한 도로를 가로질러 한천(漢川)이라 불리는 계곡가로 접어들면 마치 한 폭의 추상화 같은 기암(奇巖)의 세계가 펼쳐진다. 한천은 오라동에서 발원하여 곳곳에 소와 못을 만들면서 용연을 거쳐 바다로 흐르는 제주시에서 가장 크고 긴 건천이다. 그날 따라 입구엔 오는 5월 11일엔 이곳에서 제10회 방선문축제를 한다는 현수막도 걸려있었다. 그러고 보니 올해 벽두엔 이곳 방선문 일대가 국가지정 명승 제92호로 고시되었다(2013년 1월 4일). 곰곰이 생각해보면 제주에서 이처럼 자연·역사·문화자원이 한데 어우러져 긴 세월의 기억을 선명히 머금고 있는 곳도 드물다. 이런 곳이 지금까지 도지정문화재로도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다가, 최근 2~3년 사이 이를 둘러싼 논의가 관계자들 사이에서 본격화되자 갑자기 국가지정 명승으로 등극했다는 점은 늦은 감도 있지만 어쨌든 기쁜 소식이다.
방선문이 조선시대 문인관료들의 기록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약 4백여 년 전이다. 1609년 제주판관으로 도임한 김치(金緻)는 한라산 등반을 위해 말을 타고서 제주성을 나서 올라가다가 이곳에서 쉬면서, "절벽의 골짜기를 굽어보니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진초록으로 우거져 참으로 감탄할 만하였다"고 적고 있다. 또, 1694년 제주목사로 도임한 이익태는'지영록'에서 이곳을 '거암곡'이라 하면서, 한 개의 커다란 돌이 언덕에 연결되어 골짜기 입구를 가로 질렀는데, 가운데는 큰 구멍이 뚫려 마치 문과 같이 되어 있다고 묘사한 바 있다. 또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이곳은 영주10경 중 '영구춘화'로 불리는 풍류의 명소가 되었다. 그 증거를 우리는 이곳 주변 바위들 곳곳에 새겨진 사람들의 이름과 오언율시, 제액 등에서 어렵지 않게 엿볼 수 있다. 물론 방선문 계곡 말고도 도내엔 용연을 비롯하여, 산방산, 탐라계곡 그리고 백록담 일대에도 그 시대가 남긴 마애명들이 전해진다. 하지만 방선문 계곡의 그것들에는 비할 바는 아니다.
그렇다면 방선문 일대가 그 수많은 선비·고관·시인·유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수려한 자연 절경도 절경이지만 이곳은 일찍이 한라산을 오르내릴 때 등반길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또 이 일대 오등동, 오라동에는 일찍부터 선비촌(글방)이 형성되어 많은 유생들을 배출하는 한편, 중앙에서 온 선비들과 시와 학문을 교류하며 풍류를 즐기던 곳이었다. 요약하면 이곳은 적어도 300여년(1600년대~1900년대)이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 신분과 관직, 고향을 달리하는 사람들의 흔적이 응집된 장소이자, 조선시대 선비들이 '풍류'라는 공통된 미의식을 공유했던 현장인 셈이다.

▲①다케노 세이기치가 방선문에 대한 설명을 적어넣은 그림 뒷면. 1920~30년대 방선문을 사이에 두고 ②위로는 한라산 등반을 ③하류에서는 용연 뱃놀이를 하는 일본인 남녀노소.(②은 현 후쿠오카현 거주 다카하시 도오루 제공, ③는 1929년 발행 '제주사진첩'에서 발췌) ④방선문에 마지막으로 새겨진 암각글자.
# 근대제주와 방선문
이런 과거의 명성 때문일까? 일제강점기 1912년에 입도해서 30여년을 제주 성내에서 산 일본인 다케노 세이기치도 '제주도 방선문의 기경(奇景)'이라는 제목으로 그림과 메모를 남겼다.
그림은 선명한 능선을 띤 한라산과 더불어 거대한 암석과 울창한 수목이 식생하는 방선문 계곡 일대를 묘사하고 있다. 그림 좌측 하단에 푸른 초목으로 덮인 반원형 굴, 즉 방선문도 보인다. 물론 이처럼 방선문과 한라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구도는 그림에서나 가능할 일이다. 어쩌면 세이기치 자신의 기억에는 저 두 장소가 늘 함께 했다는 말일 수도 있겠다. 그림 뒷면의 다케노 자신의 메모를 보면,
"방선문은 석문으로 기암이며, 부근 계곡 사이에는 거대한 암석이 의연하게 우뚝 솟아 있다. 바위 위에는 철쭉, 단풍, 귤, 난초, 떡갈나무 등, 지고의 세월을 견딘 수많은 각종 고목의 어린나무들이(정원 나무용) 풍아하게 식생하고 있다. ……감나무에서는 감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장관을 이루었지만, 이것은 나의 어린 시절의 얘기고, 그 후 무심한 사람들이 각종 수목을 난폭하게 베어 연료로 쓴 것은 진정 유감스러운 일이다. 당시 이곳은 이러한 경관을 칭송하는 영주고관(領主高官) 등 모든 계급의 관광지이기도 했다. 나는 소학교 재학 중 소풍이나 나들이로 이곳을 열성적으로 다녔고, 이 부근을 즐겁게 걸어 다녔다."
이곳은 당시 일본인들 사이에도 정평이 났던지 소풍과 나들이 장소였다는 점이 확인된다. 이런 맥락에서 사진 ②과 ③같이 1920년대 전후로 일본인 남녀노소들이 제주 방선문을 사이에 두고 위로는 한라산 등반을, 계곡 하류 용연에서는 뱃놀이하는 장면도 놓칠 수 없다. 일본에 의한 근대화의 이런 낯선 풍경들이 당시 서서히 일상풍경으로 자리 잡아 갔음을 하나 둘 목격할 수 있는 대목이다. 여기서 다케노의 방선문 그림은 당시의 풍부한 자연자원뿐만 아니라 어쩌면 방선문의 근대화랄까, 그 장소의 운명 등도 차분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제주 근대의 서막. 이것은 방선문 벽에도 이미 예고된 일이었다. 방선문 후벽에 세로로 크고 또렷하게 새긴 "洪鐘宇 光武甲辰五月 日"이란 글만큼 근대제주의 서막을 간결히 압축하는 표현이 어디 또 있을까? 이는 1903년 제주목사로 도임한 홍종우가 1904년 5월에 이곳을 찾았다는 말이다.
국내 프랑스 최초 유학생, 친일파 개화세력인 김옥균을 암살한 수구파. 대한제국의 수립 당시 고종의 총애를 받지만 점차 친일관료 세력들에게 몰려 제주목사로 좌천한 사람. 경무청, 재판소, 우편소 등 제주에도 신식제도가 들어오면서 백성들의 소요가 끊이지 않던 때 제주에 부임한 그는 그때 과연 어떤 심경으로 이곳을 찾았던 것일까? 마침 그가 제주를 떠나 행적을 감춘 1905년에는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그 해 이에 격분한 반일 개화파 지식인 민영환이 자결한다. 이듬해 나세환 등 12인이 경기도 가평군 하판리 현등사(懸燈寺)로 가는 길가의 바위에 '閔泳煥'이란 이름 석 자를 세로로 크게 새긴다. 민영환이 이곳에 있을 때 기울어가는 조선의 국운을 탄식하며 통곡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예로부터 선비들의 풍류문화의 본거지였던 전국 계곡의 수려한 바위들이 근대의 시작과 더불어 급기야는 시대의 증언과 욕망의 표출장소로 용도 전환되었다 하면 너무 지나친 표현일까. 그러고 보니 방선문 계곡바위 한편에 생경스럽게 새겨진 '제주축항사무소'라는 글자(사진 ④)도 지나칠 수 없다. 이것이 처음엔 참으로 거슬렸는데,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조선시대 풍류의 마지막 변형이자 동시에 근대제주를 상징하는 제액(題額)이 아니었겠나 하는 생각은 나만의 억측일까? <미학자·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