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①1909년경 산지천 상류, 농업학교 본부인 내성 부근에서 바라본 안경교(다케노 세이기치 그림 / 8.7×13.7㎝). ②구한말 산지천 동남쪽에서 바라본 제주성의 동남단 단애와 쌍홍예교('제주100년'). ③1930년대 제주농업학교 전경('사진으로 엮는 20세기 제주시',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1)). ④1930년대 제주농업학교(내) 학생조회('濟州高 百年史'(I), 제주고등학교 총동창회, 2011년). ⑤1910년대 산지천 동남쪽에서 바라본 제주성내('全南寫眞誌', 木浦新報社, 1917년). ⑥오늘날 제주시 동문로터리와 동문재래시장 일대 약도(네이버 지도).
안경다리·견고한 성곽 등 건물 확인케 해줘500년 전통 제주교학의 터전·고득종 터도
'제주미학 산책'이란 표제를 걸고 달려온 지도 벌써 6회째다. 그간 한 계절이 훌쩍 지났다. 그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산지천가를 맴돌고 있다. 거리로 치자면 남북으로 불과 약 2㎞에 지나지 않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 지대와 연루된 자연물~인공물~사람들 사이의 역사적 존재의 흐름과 그것들의 실존 연관성을 생각하면, 물리적 거리로는 환산할 수 없는 역사의 깊은 수렁에 빠져 결코 쉽게 빠져 나오고 싶지 않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 깊은 수렁이되 비장한 매력이 넘치는 그런 수렁! 어쩌면 그러한 수렁에 빠져 보는 것이 우리의 '제주미학산책'의 묘미라면 묘미라 하겠다. 그러면서 우리의 산책은 이 땅에 연루된 삶의 무한한 이야기를 추적하고, 듣고, 이해하면서 그 세계를 추체험(追體驗)하는 행위이고 싶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만나고 언급하는 자연적 풍광이나 개별 구축물들은 그 자체의 역사나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논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들 구축물들을 품어 온 이 땅의 무수한 기억(이야기)을 뒷받침하기 위한 근거나 배경이 되었으면 한다.
1912년에 부모와 함께 내도하여 제주성내에 30년 동안 산 다케노 세이기치의 그림엔 무수한 이야기가 있다. 오늘 접하는 그림①은 우리를 산지천 상류로 데려간다. 그림 뒷면의 메모에 따르면, "(중략)이 그림은 1909년~10년의 풍경이다. 이후 내성의 석문 부근에는 당시의 관청을 상징하는 기와로 된 견고한 건물이 다수 있었다. 이곳은 1935년경까지 제주농업학교의 일부로 사용되었는데, 대부분은 시간이 경과하면서 철거되었다. 그러나 안경교(석조성벽 부근)는 현존하고, 외성벽도 그 흔적만 남기고 있다. 다리 건너편은 하천이고, 거암들이 하천 속에 첩첩이 누워있다. 고송, 전나무, 철쭉, 동백, 벚나무 외에 여러 진귀한 나무들이 하천 변에 번성했다."
그의 메모에는 내성 즉 간성의 석문, 기와로 된 관청 건물, 제주농업학교, 안경교 등이 언급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사진②는 다케노의 그림을 생생하게 뒷받침해 준다. 그림①과 사진②에서 안경교(초록색□)와 간성의 석문(보라색□)을 눈여겨보자. 지금의 위치라면 지도⑥에 같은 색 모양으로 각각 표기해 보았다. 특히 간성의 석문(그림①, 사진②, 지도⑥ 보라색□)의 경우, 그것은 1780년 산지천 서안에 남북으로 간성을 쌓을 때 각각에 세운 두 문 중 하나로 보인다. 즉, 산지천 북쪽의 중인문이 산지목골로 통하는 관문이라면, 여기 보이는 것은 소민문으로, 그것은 사진②의 위치상 산지천 남쪽의 항골로 통하는 중간 지점에 놓인 것으로 보인다. 사실 지금까지 소민문의 정확한 위치를 언급한 자료를 제대로 접하지 못했다. 간혹 그것이 검정목골(사진⑤, 지도⑥ 빨간색○) 입구에 있었다는 기록 정도가 전부다. 하지만 1910년대에 찍은 사진⑤에 따르면 검정목골 입구는 동문로터리에 더 가까이 있음으로, 그 지점을 소민문 자리로 보기엔 오현단의 안경교 쪽에서 보면 너무 멀다. 혹시 필자의 생각이 틀렸다면 지적해 주기를 바란다.
그림①과 사진②의 석문을 통과하면 나무들 사이로 기와 건물이 보인다. 지금의 오현단 경내가 되겠다. 다케노도 언급하고 있듯이 그곳은 일제강점기 제주농업학교(1437외 1421번지 일대, 지도⑥ 검정색○)로 쓰였다. 사진③은 우리에게 비교적 익숙한 1930년대 제주농업학교 전경이다. 물론 해방 후엔 이곳이 오현중·고교가 들어온다. 그래서인지 모 사진집에서는 동일 사진을 쓰면서 이를 1950년대 후반의 옛 오현중·고교라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시정될 필요가 있다.
사실 이 일대는 500년 이상의 전통을 이어온 제주의 유서 깊은 교학의 터전이다. 1907년에 설립된 사립 의신학교는 제주도 최초의 근대적 중등교육기관이자 제주공립농업학교(1910년 출범)의 전신이다. 또 이 일대는 고득종 터(1421번지)가 있는 곳으로, 일찍이 1660년엔 향교 다음으로 오랜 전통을 지닌 장수당이 그 터에 설립된다. 이괴 목사의 '장수당 기'에 따르면 이곳은 "한라의 정맥이 꾸불꾸불 이어오고 북쪽으로 달려오다 하나로 합쳐져 하나의 언덕을 이루었는데, 앞에는 큰 바다가 임하고 왼쪽 오른쪽으로는 감싸 안아, 이름난 터"라 한다. 그리고 바로 남쪽에 귤림서원이 설립(1665년)되고, 1871년 서원철폐령과 함께 두 학당이 훼철되자, 귤림서원 터에 경신재를 세워(1875년) 선비들의 자제를 교육했고, 그 남쪽 성벽에 오현단(1892년)제단을 쌓아 해마다 분향을 해 오는 곳이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에 와서는 농업학교가 이곳에 들어선다. 학교 측은 1922년엔 당대 최고 수준인 신교사 1동을 신축하고, 1927년에는 의신학교 시절 건축되어 노후한 교사를 기숙사로 개축하고, 1930년엔 또 다시 현대식 건물 1동을 낙성하여 본관으로 삼는 등 각종 부대시설을 연차적으로 확충했다. 사진④는 운동장으로 오현단 쪽을 바라보며 학생조회를 하는 장면이다. 오른쪽 목조건물은 유도장이다. 사진엔 안 보이지만 운동장 우측엔 숙직실, 기숙사, 양잠실, 좌측에는 돈사, 관사, 과수원이 있었다 한다. 이는 1930년대 본교 교감이었던 다카하시 겐지로의 자제 다카하시 도오루(1929년 제주 출생, 현 후쿠오카 거주)씨의 증언이다. 당시 농업학교는 엽서로도 나올 만큼 사람들의 관심을 끌던 곳으로, 각종 단체와 수학여행단이 내방하여 농장과 교내를 참관, 견학했다고 전한다.
한편, 1910년대 오현단 일대의 농업학교를 따라 동문시장 쪽으로 내려오면 사진⑤의 경관이 펼쳐진다. 동문로터리(사진⑤, 지도⑥ 노란색○)에서 좌측으로 가면 검정목길(빨간색○)이 보이는데, 필자의 흥미를 끈 것은 그 중간에 있는 빈 밭(파란색○, 이도리 1349번지, 1362번지 일대)이다. 1910년대 적어도 이런 풍경이던 것이 차차 소유권이 개인에서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또는 종교단체로 이전되면서 신식 건물이 차차 들어서게 됨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중엔 1920년 4월에 인가받아 설립된 4년제 남녀공학 명신학교와 그 후신 갑자의숙이라는 개량서당(1924년)도 있었다. <미학자·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