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자의 제주미학산책](7)1909년경 제주성 남문 부근의 경관

[고영자의 제주미학산책](7)1909년경 제주성 남문 부근의 경관
일제강점기 읍성 철폐령 이후 마지막까지 건재
  • 입력 : 2013. 07.10(수)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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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 방어 역할 난공불락 '성곽 도시' 흔적 뚜렷
구한말에는 성내인-성외인 '편가르기' 용도 전환

오늘은 다케노 세이기치의 그림과 함께 산지천 남수구를 벗어나 서진하여 제주성의 남문(南門)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옛 기록에 따르면 제주성에는 동쪽과 서쪽, 그리고 남쪽에 성문이 모두 셋 있었는데(간성의 문과 남북수구는 별도), 이 중 외부인들에게 관문이었던 남문은 다른 두 문보다 가장 먼저 세워져(1512년), 가장 나중에 헐린(1918년) 조선시대 건축물이다. 한편, 제주성의 최초 건립년도는 그보다 훨씬 이전의 탐라시대로 거슬러 올라 추정하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하지만 중앙정부의 관할 하에 '읍성'의 면모를 갖추고 왜구에 대한 지방 방어시설이면서 동시에 지방 행정의 중심지로 본격적인 기능을 했던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다. 이 맥락에서 중앙정부에게 있어서 제주성은 "해외에 있는 이름난 변방"으로 "요새를 지키고 방어함이 엄중하게 해야 함은 다른 곳과 견줄 바가 아닌"('정원루'에 대한 '강혼의 記'에서) 그런 곳이었다.

▲1909년경 제주성 남문 부근의 경관(다케노 세이기치 그림, 8.7×13.7㎝).

오늘 소개하는 다케노의 그림①은 남문성 안에서 바라본 성 밖, 즉 동쪽과 서쪽으로 각각 에워싼 성벽의 외양을 담고 있다. 그림엔 특히 사람들과 말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차단할 요량의 구불구불한 입구와, 성벽 군데군데 돌출된 치성(雉城, 성벽으로부터 돌출시켜 전방과 좌우 방향에서 접근하는 적과 성벽에 붙은 적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의 존재가 확인된다. 그리고 다케노는 다음과 같은 메모를 그림 뒷면에 남기고 있다(그림②).

"(전략) 남문에 도달하기까지 성벽의 구불구불한 통로는 지난날을 생각하면 과연 그 누구도 침범 못했을 것이다. (중략)주위의 성벽 위에 있는 각종 방비 시설로 외적의 침입을 막았을 것이라 생각하니 역시 난공불락의 요새였음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면서 다케노는 일제강점기 읍성철폐령(1910년)이라는 역사의 전환점을 증언하듯, 제주성곽이 우선적으로 해체되는 구역을 스케치 하고 있다(그림② 빨간색 점선).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제주성은 해안가 주변에서부터 헐리는 한편, 남문 부근의 성곽은 부분적으로나마 당시 마지막으로 건재했었던 것이다. 오늘날 오현단 부근의 '제주성지(도지정 기념물 제3호)'의 부분적 복원이 가능한 것도 아마 이런 역사성을 머금은 것이리라. 동시에 이 과정에서 우리는 일제강점기 성내의 관청, 일본인 거주 지역 및 상권이 동문로터리~관덕정 이하 북쪽 해안선 부근에 집중 분포된 연유를 지리적 차원에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케노 세이기치 그림① 뒷면.

▲1890년대 남문 주변 ('사진으로 본 100년 전의 한국', 1986년).

그러면 여기서 제주읍성이 온전히 건재했었던 1888년과 1901년 시점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 당시의 이들 구조물들이 과연 어떤 역할, 어떤 존재였던가를 생각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하다. 우선, 1888년 제주를 방문한 서구여행가들 중에 프랑스계 미국공사 서기관 샤를르 샤이에 롱(Charles Chaill?-Long. 그에 대해선 '세레 롱베'라는 영미식 발음으로 강문규의 '경술국치 100년 제주 원풍경을 되살린다(5)' / 한라일보 2009년 3월 2일자에 소개된 바 있음)의 제주성 남문에 대한 기록(사진③, 사진④)이다.

"두 시간을 넘게 걸어가자 제주성의 남쪽 관문이 나타났다. 수도가 가까워질수록 높은 담장이 둘러쳐진 좁은 길이 이어졌는데, 그 담장은 도시 전체를 에워싸고 있는 성벽에서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성문은 묵직하게 닫혀 있었다(후략)."

한편, 1901년 이재수의 난으로 알려진 제주민란 당시, 제주성 주변을 묘사한 김윤식의 기록 '속음청사'(김익수 역, 2010년 재판본)는 당시 제주읍성 주변이 구체적으로 어떤 위기에 처했었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성 안 사람들이 교인(敎人)들과 같이 성을 지키며, 사문(四門)에다 대포를 설치하였다."(319쪽)

"삼도에 사는 사람들이 관청에 청원서를 올리며 말하기를, '성문을 닫은 지가 시일이 오래되어 땔감과 식량이 모두 떨어져 백성들이 살아가기 어려우니, 애걸하건대 성문을 열게 하여 왕래하도록 하여주시오'하고는 거듭 모두들 관덕정 앞에 모였다."(333쪽)

▲샤이에 롱의 제주기행문이 수록된'미국지리학회지'(제22호, 1890년, 영문판).

▲1935년 남문 부근, 제6대 제주도사 다구치 테이키(田口禎憙, 중앙 안경 착용)와 사람들(故 이철 유품 사진, 동경 거주 이동민 제공)

민당들이 "삼진으로 나누어 동, 서, 남에 주둔하면서 각 마을에다 통문을 내어 성 안 사람에게 식량을 팔거나 땔감을 팔지 못하게 하였다."(334쪽)

"교인들은 불과 수백 명인데 밤낮으로 성을 지키느라 땔감과 식량이 모두 바닥이 나고 얼굴이 누렇게 병들었다."(334쪽)

이상의 인용은 극히 일부지만, 당시 남문을 비롯한 제주성이 얼마나 견고하게 외부인들을 차단하고 경계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는 제주민란이 일어나던 1901년 구한말 당시 제주성이 왜구에 대한 방어보다는 제주민들간의 교인·민당 또는 지배자·피지배자 또는 성내인·성외인 등의 편가르기와 고립을 자초한 물리적 과녁이자 방어벽으로 용도 전환되기도 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일시적 고립으로 성 안 사람들이 평소 성문을 통해 들어온 성 밖 사람들로부터 구매했던 땔감이며 식량이 바닥났었다 하니 '성곽 도시'의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일제강점기가 본격화되면서 성벽이 해체되기 시작하고 제주성 안의 많은 건물들이 헐리며 쓸 만한 관아들은 도청, 경찰서, 면사무소, 학교 등으로 사용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뿐인가? 근대식 도로가 생기면서 도로명, 지명 등이 새롭게 표기되었다. 동문로터리에서 산지쪽으로 생긴 일본인촌 元町(모토마치), 本町(혼마치), 朝日町(아사히마치)라는 지명이 그 예다. 그리고 제주 부호 및 고관들이 주로 살던 '나문 한짓골(남문에서 관아로 이르는 큰길)' 주변만 해도 대로동(大路洞), 남문통(南門通)이라는 한자식 표기와 함께 병원, 잡화점, 약방, 식료품점, 쌀집, 대서소, 서적상, 문구점, 지업사, 미국씽거미싱회사 제주분점 등이 들어선다. 1918년 남문이 마지막으로 헐리면서 새롭게 형성된 근대제주, 즉 옛 성안 풍경인 셈이다. 마지막으로 1935년 남문 부근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당시 제주도사 다구치 테이키(田口禎憙)를 중심으로 몇몇 사람들이 현지 두 아이들과 나란히 찍은 사진⑤를 보며, 이 부근의 땅만이 기억하고 감당했던 외양과 사연을 다른 각도에서 어렴풋하게나마 헤아려보기도 한다. <미학자·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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