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자의 제주미학산책](4)1909년경 제주읍 산지 풍경(하)

[고영자의 제주미학산책](4)1909년경 제주읍 산지 풍경(하)
비장미마저 감도는 공간, 북수구의 역사와 사연
  • 입력 : 2013. 05.29(수)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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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제주읍성 북수구와 공진정 전경.

1600년 건축 보수·중건·재건 거친뒤 태풍으로 유실
일제강점기 그림엽서에 소개된 무지개형 돌문다리
난간형 안경다리로 변모… 일본식 영향으로 오인

지난 글에서 우리는 다케노 세이기치가 그린 1909년경 산지 풍경을 전체로서의 공간구성이란 측면에서 접근했다. 지난번에는 전체로서의 '숲'을 보았다면, 이번에는 그 숲을 이루는 부분으로서 '나무', 즉 개별 구축물로 시선을 옮기고자 한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이들 개별 구축물들의 역사와 사연 또한 전체로서의 공간의 그것들만큼이나 깊고 비장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이 글은 다케노의 그림 및 몇몇 사진들과 함께 특히 북수구(파란색○)와 공진정(빨간색○)에 대한 이야기다.

북수구는 조선시대 성벽의 일부를 이뤘던 수문의 기능을 하는 문으로, 현재 산지천 북성교 지점(광제교에서 북쪽으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 수문은 아치형 즉 무지개 모양을 하고 있어 기록에는 홍문(虹門) 또는 홍예문이라고도 전한다. 때문에 건입동 사람들은 이를 두고 '휑이문'이라 했다는데, '휑이'는 '홍예(무지개)'를 제주어로 발음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다. 그 외에도 북수구는 근대 일본의 영향인지 점점 안경다리 홍예다리, 홍문교, 원교, 외알 안경교(일본인들 사이에서는 '가타 메가네 바시') 등의 다리 이미지로 불리게 되었다.

▲1909년 제주읍 산지의 풍경(다케노 세이기치 그림).

다케노의 그림①에도 이 홍예문(파란색○)이 등장한다. 그 문의 기억이 너무 왕성해서일까, 그는 그 지점에 단홍예문과 쌍홍예문을 동시에 등장시키고 있다. 그가 왜 그랬는지는 확인할 길 없으나, 예를 들어 다케노 그림과 거의 비슷한 구한말기의 사진②를 보면 그 지점엔 단홍예문 하나만 있었다. 한편, 그 즈음 제주도에 체류했던(1897. 12~1901. 7) 유배인 김윤식은 사진② 공진정(빨간색○)에 올라 이 홍예문를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읊는다.

"석성 주위와 마주치는 데를 굽어보니 수구에 홍예문이 지어져, 이 위를 통해 왕래한다. 수문의 바깥은 백규(百頃)의 뚝으로 둘러싸인 연못에 봄물(春水)은 넘실거리는데, 오리 떼가 열을 짓고 있다. 제방 위에는 파란 버드나무가 빙 둘러 있고, 언덕 위에는 인가가 있어 복숭아꽃이 곳곳마다 활짝 피어 있다. 그림과 같은 경치이다."('속음청사' 1898. 5. 15)

그래서인지 일제강점기 때엔 이 경치를 담은 홍예문 그림엽서가 유포될 정도였다. 그런데 필자가 궁극적으로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다른 데 있다. 그것은 이 홍예문의 탄생에서 소멸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특히 일제강점기를 맞아 이 문에 대한 원형 기록과 그것을 담은 사진들이 혼선을 빚으며 제대로 조명되지 않고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북수구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는 성윤문 목사 재임시절에 창건된 이래(1600년), 1652년 8월에 큰 비바람으로 헐리자 당시 재임 목사 이원진이 "성채(城砦)가 있는 곳이니, 수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장구한 계획을 세우고자 한다면, 돌로 쌓는 것만 못하다" 하여 이듬해 비로소 무지개형 돌문(石門)이 제주 땅에 탄생하였다. 이후 수차례 태풍과 홍수 등으로 파손되며 북수구는 보수·중건·재건의 역사를 걸어왔고, 20세기 초반에는 그림①과 사진②의 모습을 하다가 어느 사이 사진③으로 개축되고, 마침내 1927년 8월 태풍으로 유실되었다.

▲1910년대~1920년대 초반의 모습으로 추정되는 제주성 북수구와 공진정.

문제는 20세기 전후 불과 30년 남짓 기간 사이에 홍예문이 사진②에서 사진③ 외양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즉, 구한 말기까지만 해도 홍예문 위엔 난간이 없었는데, 어느새 사진③에 보이는 동자석과 용두석으로 구성된 난간형 '안경다리'로 변모한 것이다. 사진③엔 그것을 기념하는 이들인지 아니면 당시 활발했던 일본인 고적(古蹟) 조사단인지 일본풍의 사람들이 보인다. 이보다 더 흥미로운 점은 당시 일본 최고의 고건축학자인 후지시마 가이지로 교수의 글이다. 그는 조사차 1925년 4월에 내도하여 10일 정도 있다가 떠난 직후, 일본어 건축 월간지 '조선과 건축'에 '제주도의 건축'이란 글을 4회 연재한다. 그 중 7월호에 후지시마는 제주 홍예문을 홍교(虹橋)라 칭하면서 다리 세부 사진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

후지시마 글의 요점은 그 난간을 한 홍교는 나가사키 가교의 형식을 띠고 있으며, 그것은 '일본과의 원래의 관계를 보여주는' 예라 적고 있다. 사진②에서 보았듯이 제주의 홍예문엔 원래 난간이 없었다. 오히려 제주 홍예문에 일본식 난간이 세워지고, '문'이 '다리'의 개념으로 전이한 것은 일제강점기를 전후한 때이지 않았던가? 그런데 일본을 대표하는 고건축학자마저 그것을 처음부터 갖췄던 외양인양 하고, 이를 일본의 영향으로 본 것에는 고개를 갸우뚱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가 내도한 시기를 감안하면 홍예문의 조선 양식은 사라지고 없던 때다. 그가 제주에서 본 것은 사진② 이후의 '일본식' 난간을 갖춘 다리(사진③)로, 그와 흡사한 양식이 나가사키를 포함한 일본 규슈 지역에 전해진다.

▲1927년 10월(제149호) 조선총독부 정기간행물 '朝鮮' 표지사진으로 나온 '제주도 안경교'.

한편, 이 '일본식' 홍교를 담은 또 하나의 기록 사진④가 우리의 눈길을 끈다. 1927년 8월에 유실되었다는 홍교가 같은 해 10월 '제주도 안경교' 라는 타이틀로 총독부 기관지 '朝鮮'의 표지사진으로 등장한다. 아치 저편엔 그림①과 사진②·③에 존재하지 않던 일본식 건물들도 보인다. 이로 보아 1920년대 들어 홍교를 비롯한 주변 역시 일본화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2개월 전 유실된 제주의 다리가 당시 총독부 기관지 표지사진으로 등장했다는 점은 무엇을 의미할까?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제주 홍교가 유실된 지 6년 후 즉 1933년엔, 그것이 '제주 북문지 홍교'라는 타이틀로 '朝鮮古蹟圖譜' 제13권에 소개된다는 점이다. 이 역시 일본은 1933년 시점에서 그것을 다시 한 번 기록하면서, 제주의 명승고적의 양식에 '묻었다'는 일본 유래설을 재차 강조하고자 했던 것일까! 필자가 최근 몇 년간 구한말 이후 제주도 사진을 수집하면서, 특히 홍예문·홍교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러한 의문들에서였다.

▲1935년경 산지교 너머로 보이는 측후소, 제주신사 전경.

끝으로 사진⑤는 1930년대 산지교 전경이다. 일부에서는 홍교가 무너지면서 그 대신에 산지교가 가설되었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나, 정확히 말하면 산지교는 홍교가 있던 지점에서 북쪽으로 50여 미터 떨어진 곳에 가설되어 서쪽으로 난 북신작로(일명 朝日町)를 연결하는 일직선 다리였다. 그리고 사진⑤를 통해 1930년대엔 그림①과 사진②·③에 등장하던 공진정(빨간색○)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제주신사(빨간색○)가 들어섰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또한 80여 년 전 당시 산지천변 땅의 경험임을 사진은 묵묵히 기억하고 있다.

<미학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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