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자의 제주미학산책](8)1909년경 제주성 서문~병문천~부러리 동네

[고영자의 제주미학산책](8)1909년경 제주성 서문~병문천~부러리 동네
서문성 주변 땅의 역사와 삶의 자취 궁금증 더해
  • 입력 : 2013. 07.24(수)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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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①) 다케노 세이기치의 '제주읍 성내 서문으로부터 서문천을 지나∼'(8.7×13.7㎝).

한라산서 발원 병문천 성담 따라 바다로 흘러
1930년대 주민 공동작업으로 '세멘다리' 가설

오늘은 다케노 세이기치의 그림과 함께 100년 전 제주성 서문 부근의 풍경을 주섬주섬 주워 담아 볼까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산지천 동쪽 동문을 출발하여 남문을 거쳐 서문이 있었던 곳에 당도했다. 문득 80년~100년 전까지만 해도 건재해 있었던 조선시대 구조물인 '성(城)'과 그 해체를 전제로 한 도시 근대화(modernization·urbanisation)는 지금의 시점에서 과연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100년 전, 50년 전만 그랬던가! 그 후로도 우리는 비약적 경제성장을 전제로 초고속 근대화의 시대를 살아왔다. 이를 위해 도심은 더 많은 도로와 대지를 확보하기 위해 언덕을 깎고, 하천을 복개하고, 바다를 매립하는 등 실로 5년, 10년이 멀다하고 새로운 생활문화경관을 계속적으로 창출하고 있다. 그러니 이때 우리가 말하는 '제주·전통·문화·경관'의 파괴와 복원은 과연 시점, 어떤 기준에서 가야 하는지 솔직히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이런 심정으로 오늘 나는 100년 전 제주성 서문 '터' 주변을 서성거린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당시 이 주변을 살았던 다케노의 그림①과 증언이 나를 이곳에 오게 하였다. 과연 그 누가 이 풍광을 현재의 관덕정~성내교회~서문로터리(복개된 병문천)~제주향교 주변이라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을까? 필자라고 별 수 있었겠는가? 대부분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성벽과 성문, 길과 하천 등등. 사실 이에 대해선 관련 문헌을 보고, 화가의 메모를 참고하고, 아는 어른들에게도 묻고, 현장을 몇 번 탐방한 후에라야 그나마 아련히 이해할 수 있었다.

▲(사진 ②) 미국인 동물학자 앤더슨이 촬영한 1913년 제주성 서문.

▲(사진 ③) 앤더슨의 기행문이 실린 월간지 표지(1914년 4월).

다케노는 그림①에 '제주읍 성내 서문으로부터 서문천을 지나 제주향교 부근을 바라봄'이란 제목을 달고 있다. 그림①에 방향표시는 필자가 한 것으로 여기서 서문(진서루)은 말 그대로 그림 좌측 서쪽에 해당하는 것이다. 옛 제주성 서문은 관아와 단거리로 이어지는 관문이며, 서성 안엔 횃불감을 저장하는 주사(州司)와 곡식을 저장하는 사창(司倉)이 있어 옛날에는 이 부근을 창뒷골이라 하는 한편, 일제강점기 때에는 이곳 일대를 주사동(州司洞)이라 부르곤 했었다.

한편, 1914년에 훼철된 서문 터에 관해 말하자면, 현재 이를 알리는 표석이 관덕정에서 정서쪽으로 난 길에 세워져 있으나, 오히려 그것은 제주역사 연구가인 김익수, 고영철의 지적에도 있듯이, 지금의 성내교회 건너편 건물들 주변에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다케노 역시 '관덕정에서 서문으로 나오려면 서남쪽으로 100~120미터 올라가야 한다'고 메모를 남기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서문의 정면을 담은 사진②가 흥미를 끈다. 이는 서문을 촬영한 유일한 사진으로, 김봉옥의 '제주통사'에 소개되어 이후 널리 활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 사진의 출처에 대해선 아직까지 언급된 바가 없는 것으로 보여 덧붙인다. 근년에 개인적인 연구 차원에서 알게된 사실이지만,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은 미국인 동물학자 앤더슨(M.P. Anderson)으로, 그는 1913년 8월에서 와서 40일간 제주에 머물면서 한라산 등지에서 조사한 후, 귀국하여 이듬해 '오버랜드 먼슬리'(사진③)라는 월간지에 '켈파트 섬에서 40일간'이라는 기행문을 이 사진을 포함한 여러 사진들과 함께 싣고 있다.

한편, 다케노의 그림① 서성 안에 보이는 건물들에 대해선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다만, 우측 하단 빨간색○로 난 도로는 관덕정으로 이어진 도로라는 메모가 있다. 이를 놓고 볼 때 그 옆 초록색○는 김익수 선생의 의견에 따라 '출신청(삼도동 905)' 건물로 볼 수 있다. 김윤식의 '속음청사' 에는 "첩(堞)을 따라가다가 서문 아래에 있는 출신청을 보았는데…."(103쪽)하는 대목도 이와 오버랩된다. 그리고 그 출신청 건물이 1910년에는 성내교회당으로 매입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으니 역사의 간극을 약간 좁힌듯하다.

▲(사진 ④) 지금의 제주시 서문로터리 주변. 관덕정, 제주향교, 서사라, 탑동 등 동서남북을 연결하는 지점이다.

다음은 그림① 상단 하천가로 걸음을 옮기자. 현재는 서문로터리(사진④)로서 동(관덕정)과 서(제주향교), 그리고 남(서사라)과 북(탑동)을 연결하는 지점이다. 지금은 이 일대가 복개되어 과거의 풍광을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림①엔 서문천 또는 병문천이라 불리는 하천이 한라산에서 발원하여 바다로 흘러내리는 풍광이 펼쳐져 있다. 다케노 기억에 따르면 서문다리는 일제강점기 일주도로 준공 후 가설한 것으로 이전에는 다리가 없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기억으로 신옥년씨('디지털 제주시문화대전' 병문천 부분) 역시, 그의 나의 대여섯 살쯤(1930년대쯤) 되어 다리를 놓기 시작했는데,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모래 짐도 나르고 공동 작업을 해서 다리를 세웠다고 한다. 그 다리를 '세멘다리'라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오일장이 열리는 날은 관덕정 앞에서 서문다리를 거쳐 서문시장까지 행상이 들어섰고, 하천 주변으론 채소, 땔감 파는 사람들이, 병문천 하류(한두기) 바닷가 쪽으로는 해녀들이 살았다고 한다.

우리는 그림① 상단 파란색○(현 서문시장 위)에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과거 이 일대는 거의 소나무 밭이었고, 시신을 묻는 묘지들이 있었다고 한다. 또 그림엔 매우 작게 그려졌지만, 일종의 '홍살문' 표시도 보인다. 즉, 이는 관청 또는 능, 묘 따위가 있다는 의미로 주지하다시피 이곳은 제주향교가 있는 곳으로 1827년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아울러 우리가 주목할 것은 향교 북쪽(파란색○ 우측)으로 펼쳐진 민가들이다. 이곳은 일명 '부러리 동네'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제주향교 뒤편에 동~서로 난 옛날의 한질(큰길. 폭 2.5m)을 '부러릿질'이라고 불렀다. 또 병문내 하류엔 과거 벌랑포(伐浪浦)라는 포구가 있었는데, 이곳 사람들은 이 지점을 '부러릿내'라고 하고, 그 포구를 '부러릿개'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마을엔 지금은 매립되어 볼 수 없으나, 비룡못(현재, 비룡1길-어린이 놀이터)이라는 연못도 있었는데, 그 못은 남북으로 된 타원형으로 용이 날아갈 정도로 컸으며,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마을 사람들은 전한다. 게다가 이 일대는 용담동에서 제일 먼저 생긴 마을이라 전하고 있으니 그 땅의 역사와 삶의 자취에 궁금증이 한층 증폭된다. <미학자·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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