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역사현장 일제전적지를 가다](148)제주·일본 제4차 해외비교-(3)군국주의 상징 야마토 뮤지엄

[고난의 역사현장 일제전적지를 가다](148)제주·일본 제4차 해외비교-(3)군국주의 상징 야마토 뮤지엄
과학기술 내세워 한반도·아시아 침략 사실 외면
  • 입력 : 2014. 02.26(수) 00:00
  • 이윤형 기자 yhlee@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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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세이돈 동상이 서 있는 야마토 뮤지엄 입구. 이승철기자

전함 야마토 통해 일본의 전쟁기억과 향수 되살려
가해의 역사에 대해서는 언급 없어 우경화 부채질


태평양전쟁이 일본의 패전으로 치닫던 1945년 4월, 일본 최고의 해군기지였던 구레에서는 한 척의 전함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당시까지만 해도 세계 최고이자 최강이라 불리던 거대 전함 야마토(大和)가 미군과의 일전을 위해 출항한 것이다. 목적지는 결전지 오키나와였다.

하지만 야마토는 4월7일 오후 2시 무렵 규슈 남서쪽 약 200㎞ 해상에서 침몰하고 만다. 미군기의 공격을 받아 2시간도 버티지 못한 채 깊은 바다 속으로 수장됐다. 길이 263m, 최대 폭 38.9m, 만재배수량이 7만1659톤에 이르는 거대 전함 치고는 너무나 허무한 최후였다. 승무원 3300여 명 중 270여 명만이 목숨을 건졌다.

일본 해군의 '불침함'으로 불렀던 야마토의 최후는 어느 정도 예견돼 있었다. 이미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시점에 야마토와 같은 거함거포주의는 별 소용이 없었다. 항공모함과 항공력이 해전을 좌우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이러한 전쟁의 패러다임의 전환을 예견하지 못하고 거대전함에만 매달리는 패착을 두게 된 것이다.

▲입구에 설치된 길이 4m의 대형 포신.

야마토는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공격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지 열흘 후인 12월16일 실전에 배치됐다. 이후 야마토는 별다른 전과 없이 대부분 부두에 정박해 있었다. 승무원들이 '야마토 호텔'이라 비하할 정도였다. 덩치만 컸지 실전에서는 별로 쓸모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일본의 패전이 급박한 상황에서 무모하게 출항했지만 결국 침몰하고 만 것이다. 야마토의 종말은 무모한 전쟁을 일으킨 일본제국의 몰락을 예견하는 것이었다.

히로시마현 구레시(吳市)에 위치한 야마토 뮤지엄은 일본인에게는 비극의 전함으로 기억되는 야마토를 기리기 위한 박물관이다. 2005년 4월에 건립됐다. 원래 명칭은 구레시해사역사과학관이나 야마토를 중심으로 소개하고 있어 야마토 뮤지엄으로 불린다.

박물관 입구는 '바다의 신'으로 불리는 포세이돈 동상이 버티고 섰다. 그 옆에는 길이 4m의 대형 포신과 스크루가 전시돼 시선을 끈다.

▲실제 크기의 10분의 1로 축소한 전함 야마토의 모습.

박물관 입구로 들어서면 구레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실과 야마토 광장이 있다. 이곳에 실물 크기의 10분의 1로 축소한 전함 야마토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관람객들은 야마토 전함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내부에는 제로센 함상전투기와 자살특공어뢰인 가이텐, 특수잠항정인 가이류(海龍)등 각종 전쟁무기들이 전시돼 있다. 오키나와 특공작전에 출격한 전투원의 유서와 유품, 미군의 구레 공습 때의 모습등도 소개하고 있다. 4층 전망대에서는 야마토를 건조했던 도크 설비 등을 볼 수 있도록 했다. 야외에는 거대한 잠수함이 방문객들을 압도한다.

야마토 뮤지엄은 과학기술 측면에서 야마토 전함을 보여주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지만 자살특공대원의 유서와 유품, 가이텐 등을 통해 전쟁을 미화하고 있다. 오히려 옛 영화를 통해 제국주의 일본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고나 할까. 전쟁기억을 되살려 우경화를 부채질 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야마토는 전후 일본 만화영화에서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되는 '우주전함 야마토'의 소재가 된다. 이후 1974~1975년 TV만화영화시리즈로 개봉됐고, 1977년에는 극장판으로 만들어져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침몰한 야마토가 만화와 영화로 부활하면서 2005년 개관한 야마토 뮤지엄은 많은 관람객들이 찾고 있다.

▲실내에 전시된 제로센 전투기 등 각종 무기들.

구레시는 야마토를 통해 역사적 과거를 상품화하면서 연간 100만 명이 넘는 방문객들이 찾는 명소로 떠올랐다.

구레는 동양 제1의 군항이자 일본 제1해군공창지역으로 번성을 누렸던 지역이다. 태평양전쟁 시기 구레는 제국 일본 해군의 거점이었다. 당시 일본 10대 도시에 꼽힐 정도로 번성을 누렸다. 인구는 40만 명에 이르렀다. 구레의 역사가 바로 메이지 이후의 일본 근대화의 역사라고 할 정도이다.

이곳에서 건조한 수많은 함정들은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첨병으로서 아시아 태평양의 광활한 해역을 누볐다. 일본의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데 구레는 핵심이었다. 아시아 각국에 막대한 전쟁의 고통을 안겨준 침략의 산실이 바로 구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중에서도 일본 과학기술의 결정체라는 야마토는 군국주의 일본의 기념비적 상징이자 자부심으로 받아들여진다. 한편에서는 일본의 후진성을 극복했다는 최상의 징표로 평가하기도 한다.

메이지시대 일본은 '탈아입구'를 줄기차게 부르짖었다.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사회를 지향하는 정책은 지금도 일본의 대외관계에서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 일본이 오히려 유럽에 구축함을 수출할 정도의 기술력을 지녔고, 그 기술이 오늘날 일본의 부흥을 이끌었다는 설명 앞에 관람객들은 자부심을 느낀다. 아시아를 침략하고 식민지화 한 가해의 기억은 망각돼 버리고 만다.

야마토 뮤지엄은 이런 역사적 사실들은 외면한 채 대형 전함들을 건조한 조선기술을 자랑하면서 제국주의 일본의 전쟁기억과 향수를 되살려내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제2차세계대전 종전 50년인 1995년을 기념하여 평화박물관 건립 붐이 일었다. 야마토 뮤지엄 건립도 이 같은 평화박물관 유행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당시 건립된 대부분의 박물관이 그렇듯이 야마토 뮤지엄 또한 한반도와 아시아 여러 나라를 침략한 가해의 역사는 애써 외면하고 있다. 제국주의 일본의 과학기술을 자랑한다는 명분으로 전쟁범죄는 감추고 우경화를 교묘히 부채질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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