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고 싶다](94)조천읍 신촌리 골목길

[그곳에 가고 싶다](94)조천읍 신촌리 골목길
  • 입력 : 2015. 01.23(금) 00:00
  • 표성준 기자 sjpyo@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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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리에는 미로처럼 얽히고 설킨 돌담길이 고스란히 남아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다. 표성준기자

미로형 골목에서 만나는 다른 세상
제주인 삶 오롯이 담긴 돌담길
세월의 변화에도 옛 정취 남아
오랜 역사 만큼 이야기도 풍부

1970년대 초부터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바다 건너 제주에까지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제주시 조천읍 신촌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달구지라도 마주치면 옆으로 비켜서야 할 만큼 좁은 골목길이 넓어진 것도 이때였다. 이후 초가가 헐린 자리에 고급 주택이 들어서고 마을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아스팔트길도 조성됐다. 그러나 변화는 거기에서 멈췄다. 마을 어디를 가더라도 옛 골목길의 정취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신촌리를 찾았다.

신촌리 골목길을 즐기기 위한 첫 출발지로 특정 지점을 선택할 필요는 없다. 동서남북과 중앙 어디에서 출발해도 미로처럼 얽히고설킨 옛 골목길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촌리 골목길의 가장 큰 특징은 돌담이 많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새마을운동으로 길을 넓히면서 새로 쌓아올린 돌담이 많지만 옛 모습 그대로의 돌담도 있다. 세월의 변화를 보여주듯 어른 무릎 높이보다 낮아진 돌담이 있고, 세찬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서인지 2m가 훨씬 넘는 돌담도 있다. 낮은 돌담 안에는 낮은 지붕이 내려다보이고, 높은 돌담 안에는 높은 지붕이 올려다보인다. 작은 골목길 안 다른 세상이다.

신촌리에는 집 벽을 담으로 이용한 곳도 많다. 초가는 물론이고 슬레이트지붕 주택들도 집 벽을 돌담으로 이용하고, 돌담을 집 벽으로 이용했다. 돌담이 인심을 넉넉하게 만들어서인지, 인심이 돌담을 남기게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양옥 중에도 대문 없는 집이 많다. 낡은 슬레이트지붕 탓에 이웃에게 미안했던지 '낙화물(쓰레트) 발생하므로 주차하지 마세요'라는 글을 적은 널조각을 내거는 인심도 남아 있다.

약 1500세대가 모여 사는 이곳은 고려 때 제주에 설치된 14개의 현촌 중 하나일 만큼 큰 마을이었다. 역사가 오래인지라 마을과 연관된 옛이야기도 풍부하다. 설문대할망이 제주섬과 육지를 잇는 다리를 놓다가 만 흔적이 조천리와 경계인 신촌리 앞바다에 남아 있다는 이야기도 그렇다. 1653년 이원진 제주목사가 편찬한 '탐라지'에는 이곳에 '신촌과원'이 설치됐다는 기록도 있다. 조정에 유자와 귤을 진상할 목적으로 과수원이 설치된 이곳에는 진상과 관련된 신화도 전해진다.

옛날 신촌 큰물머리에 살던 김사공이 서울에 진상을 바치고 돌아오던 길에 밤중에 혼자 울던 허정승 딸을 발견했다. 아기씨가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자 김사공은 몰래 배에 태워 집으로 데리고 왔다. 숨어 살던 아기씨는 이후 해녀일을 배우고 김사공과 혼인해 많은 부를 일궈냈다. 아기씨가 임금께 은공을 갚아야 한다며 진주를 진상하자 임금은 그 보답으로 김사공에게 '동지' 벼슬을 내어주면서 부인에게는 칠색 구슬을 하사했다. 이후 사람들은 부인을 '구슬할망'이라 불렀다(현용준 '제주도신화' 중에서).

신촌리 지명 '新村'은 '새마을'에서 유래됐다. 설문대할망 전설에서 보듯 육지에 대한 제주사람들의 갈망이 응축된 이곳이 '신촌'인 것은 그 옛날 제주섬에서는 '새마을'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구슬할망' 신화는 구슬할망의 아홉 딸이 아홉 마을에 시집을 가 딸에서 딸로 이어지면서 자손을 번창시켜주는 조상이 됐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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