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록담]신춘문예에 대한 '예의'

[백록담]신춘문예에 대한 '예의'
  • 입력 : 2016. 02.15(월) 00:00
  • 이현숙 기자 hslee@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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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감하는 계절은 아직 봄을 맞지 못했는데 바야흐로 '신춘문예(新春文藝)'의 계절은 끝났다.

한라일보는 제주에서 유일하게 신춘문예를 시행하고 있다. '신춘문예'를 떠올리면 가슴떨리는 이유는 뭘까. 문학잡지의 공모·추천제 등단에 비해 신춘문예는 화려한 등단제라는 점에서 문학 지망생들의 관심의 대상이 된다. 한국에서 신춘문예를 시작한 신문은 '매일신문'이지만 일반적으로 최초의 '신춘문예'라 하면 1925년 동아일보에서 시작된 신춘문예를 말한다.

신춘문예를 담당하다보면 해넘이 기간동안 '신춘문예 열병'을 앓는다. 문학의 열정을 갖고 도전하는 문학지망생들의 '열병'보다 심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담당기자도 녹초가 된다. '전화통에 불이 나는 것'과 인터넷으로 접수를 받지 않기에 손으로 수천개의 봉투를 잘라내는 고통은 '별 것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수천편의 목록을 작성해 정리하고, 부문별 심사위원을 선정하고, 며칠간에 걸친 심사일정을 챙기고, 삽화를 그릴 화가를 섭외하고, 신문지상 연재를 준비하고, 심사위원들의 심사평을 받고, 수상자들의 수상소감을 받고, 발표이후에는 자신의 작품이 예심은 통과했는지, 누락됐던 것은 아닌지 질문하는 이들에게 성심성의껏 답해야 한다. 이것은 담당기자로서의 '예의'이다. 기자에게만 '신춘문예에 대한 예의'가 필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한 심사위원의 지적을 빌리면, '예의가 없는 당선자'는 마음같아서는 '당선취소'를 하고 싶다고 한다. 물론 그럴 수 없다. 하지만 그 마음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된다. 심사위원들은 막중한 책임감을 가진다. '신춘문예 당선작'의 이름표에는 그해 심사위원의 이름이 함께 따라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차례의 예심을 거치고 마지막까지 고심을 거듭한다. 심사위원들이 원하는 '당선자들의 예의'는 시상식에서 냉큼 상금과 상패만 챙기고 떠나버리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의 예의도 갖추지 못한 이들이 있었다는 것은 슬프다.

또 중요한 것은 일부 문학단체들의 예의이다. 어떤 문학단체는 전국의 신춘문예 작품을 모은 작품집을 발간해 판매한다. 문학단체에서는 신문사로 전화를 걸어 당선자 연락처를 묻는다. 그리고 당선자에게 전화를 걸어 당선작을 보내달라고 한다. 그렇게 몇곳이 수락하면 그 이후부터 단체는 '당연히 보내줘야 하는 것'이라는 입장으로 바뀐다. 보내주지 않으면 해당 신문사의 신춘문예 작품만 빠지게 된다는 으름장과 함께. 그렇게 발간된 책의 수익금은 전혀 신문사, 심사위원, 당선자에게 전혀 돌아오지 않는다. 아이러니한 일이 아닌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끝내 말할지 모른다. 신문사의 예의도 중요하다고.신춘문예를 시행하는 신문사에게 요구하는 '예의'는 어떤 걸까. '작품을 뽑아 상금을 준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공정한 심사는 기본이고 작가와 작품에 대한 애정을 가져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예의'가 아닐까. 어찌보면 이번에 한라일보사가 펴낸 '신춘문예 당선작품집'은 그런 의미였다. 이 책은 신춘문예 당선자들의 '처음'을 볼 수 있는 책이다.

'포기하고픈 순간에 손 내밀어준 신문사에 감사드린다'는 진심어린 수상자의 소감을 다시금 떠올린다. 그들에게 손내밀어 준 '책임'과 '예의'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이현숙 교육문화체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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