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찬미의 한라칼럼] 우리 모두의 봄을 기다리며

[고찬미의 한라칼럼] 우리 모두의 봄을 기다리며
  • 입력 : 2018. 02.27(화) 00:00
  • 김현석 기자 ik012@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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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겨울은 최강한파와 폭설로 유난히 더 길게 느껴졌지만 그 매섭던 동장군도 태동하는 봄기운 앞에서는 더 이상 맥을 못 추고 물러갔다. 기나긴 혹한에 모두가 지치고 힘겨웠지만, 자연의 순환은 그 어떤 시련에도 끝은 있고 새로운 시작이 온다는 것을 어김없이 가르쳐 준다. 그래서 모진 추위를 견뎌 움튼 새싹에 이는 따스한 봄바람은 몸의 한기만 밀어낼 뿐 아니라, 지친 우리 마음까지 달래며 새로운 희망을 안겨다 준다. 그러니 길고 긴 겨울 끝에 성큼 다가온 2018년 봄이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설레는 마음으로 봄을 맞이하는가 하면, 슬프고 더 잔인한 봄을 겪는 이들도 더러 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쿠마의 무녀 시빌(Sybil)은 회생의 계절 봄을 그 누구보다 가장 괴롭게 맞이했다. 아폴론 신에게 영생을 빌어 그 소원대로 영원히 살게 되지만, 영원한 젊음까지는 선사받지 못한 시빌은 한없이 늙어만 갈 뿐이다. 그런 그녀에게 겨우내 잠들어 있던 만물을 다시 깨우고 되살리는 봄은 오히려 원망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따스한 봄기운에 취해 즐겁게 노래할 때, 시빌만 홀로 차디 찬 겨울의 연장선 위에서 몸을 떨며 비탄에 더 잠긴다.

이렇게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은 차라리 모두에게 혹독했던 겨울이 더 나았더라는 패배감과 절망에 빠지게 만든다. 온 땅에 생명을 깨우는 간지러운 봄바람을 혼자 못 견뎌 죽음을 역설적으로 애원하게 되는 시빌처럼, 우리 사회도 혼자서만 따뜻한 봄 햇살을 쬐지 못해 상대적 박탈감에 사로잡히는 이들이 결코 적지만은 않다.

특히, 인생의 봄을 찬란히 누려야하는 이 사회 청년들이 시빌처럼 새로운 시작을 엄두도 내지 못하며 삼포 세대 및 N포 세대로 불리는 현실이 안타깝다. 대통령이 국가 재난과도 같다고 선포한 심각한 사회 문제 청년실업은 여전히 해결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또한 사회빈곤층으로 전락한 청년층에게 생계의 문제와 직결된 최저임금제는 정쟁의 도구로 변질되면서 과연 현실적 도움이 될지 의문이 든다. 그래서 청년 개인의 노력 여부에 상관없이 사회구조적 문제가 청년 세대로 하여금 더 나은 미래를 꿈꾸지 못하게 만드는 것 같다. 이제는 성공의 사다리였던 성실과 노력이 시대착오적 단어가 되고 있다. 그렇기에 불행히도 우리는 투기와 한탕주의에 눈을 돌리거나 무력함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청년들을 보게 된다.

봄의 주인공이어야 할 청년들이 도리어 춘래불사춘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사회는 전체적으로 위기사회라고 진단할 수밖에 없다. 개인의 의지와 노력으로만 개선될 문제는 아니기 때문에 활기에 차 있지 않은 젊은이들에게 왜 더 노력하지 않느냐는 무심한 질타는 제발 그만두어야 한다. 대신, 힘들더라도 더 인내하며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그 긍정의 에너지와 믿음에 대한 보상이 이뤄진다는 확신의 토양을 우리 모두가 일궈나가야 한다. 이렇게 부는 진정한 봄바람이 우리 사회를 훈훈히 녹이고 성실과 노력의 가치도 다시 회복시킬 것이다.

힘든 겨울 중에도 봄을 끝끝내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는 마음이야말로, 언 땅 위로 기어코 봄을 불러내는 강인한 동력이 되는 게 아닐까. 그런데도 봄의 희망찬가가 자신에게는 들리지 않는다며 비애감에 빠져 있는 젊은이들에게, 당신이야말로 바로 봄의 진정한 주역이라고 우리 모두가 봄의 응원가를 힘차게 불러 주자. 올해는 반드시 찬란한 봄을 다함께 정겹고 따스하게 누리길 바란다. <고찬미 한국학중앙연구원 전문위원·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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