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사람 이방익 표류현장을 가다] (2)16일만에 팽호 표착한 이방익

[제주사람 이방익 표류현장을 가다] (2)16일만에 팽호 표착한 이방익
물고기·물·바람으로 빚은 섬… "마조신 보살피길"
  • 입력 : 2018. 07.01(일) 2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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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개 작은 섬으로 구성된 팽호 제도
보름넘게 바다 떠돌다 8명 구사일생
해양신 모셨을 마궁 아문 모습에 감탄
오늘날 천후궁도 향피우며 안녕 기원


항공편으로 대만 팽호(澎湖, 펑후) 본섬에 발을 디뎠을때 방문객을 맞은 건 한 편의 시였다. '팽호는 물고기, 물, 바람으로 만들어진다/ 팽호사람들은 모두 물고기이다/ 모두 물이다/ 모두 바람이다'로 시작되는 대만 두예(渡也) 시인의 '팽호'란 시였다. 한국에 언제부턴가 돌, 바람, 여자가 많아 '삼다도'로 불려온 제주섬이 있다면 대만엔 물고기, 물, 바람이 많은 팽호섬이 있었다.

제주 북촌 사람 이방익은 뜻하지 않게 그 섬에 갔다. 정조 때인 1796년 9월 제주에서 배를 띄웠다 풍랑을 만나 팽호까지 떠밀렸다. 이방익 일행은 지금의 대만, 중국을 거쳐 약 9개월 뒤 조선으로 돌아왔다.

▶어업·관광업으로 먹고 살아=대만 서부 팽호 제도는 제주에서 약 2400㎞ 떨어진 곳이다. 64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졌는데 그중 44개가 무인도다. 연평균 기온 27℃로 '팽호'란 시처럼 바람부는 날이 많다. 어업만이 아니라 관광업으로 먹고사는 섬으로 팽호는 곧잘 예술작품의 무대로 등장한다. 어릴 적 바람 살살 부는 팽호 포구를 추억하는 대만 가요인 '외할머니네 팽호만'은 중국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노래다.

천후궁 내부에 전시된 마조신앙 전파경로를 담은 지도.

팽호는 이주와 침략의 지난한 역사를 거쳐왔다. 11세기 송나라 때 중국 한족이 팽호로 진출했다. 당시 복건(福建)은 부족한 농경지에 비해 인구가 집중된 탓에 하나둘 팽호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12세기에는 군대도 주둔시켰다.

명대 이래에는 중국과의 밀무역을 위해 일본인들이 팽호를 찾았다. 17세기 중반에는 38년동안 네덜란드 점령기가 이어진다. 1884~1885년 청·불전쟁 발발 직전에는 프랑스군이 팽호를 점령했다. 청나라가 청·일 전쟁(1894~1895년)에서 패한 뒤엔 일본에 팽호를 넘겨준다. 일본에게 팽호는 중국 침공을 위한 교두보였고 그렇게 50년을 지배한다. 이방익이 표착했을 무렵 팽호는 200년이 넘는 청조 통치기(1683~1895)였다.

▶"채선 위 누각에 단청이 영롱하다"=낯선 땅 팽호에서 이방익 일행이 처음 마주한 관리는 마궁대인(馬宮大人)이었다.

천후궁 전경.

마궁은 마조신(마祖神)을 모시는 제전으로 '표해록'에는 '마궁 아문'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집 좌우에 수백의 채선(彩船)이 정박해 있고 채선 위의 누각에 단청이 영롱하여 물속에 비치니 눈이 황홀하여 그림 속으로 가는 듯 했다'는 내용이다.

마조신은 대만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는 중국 복건의 영향이 크다. 팽호 역시 예로부터 복건인이 이주해온 역사를 품었다. 팽호 본섬 마공시 원도심에 남아있는 화려한 외양의 '팽호 천후궁(天后宮)'이 이방익이 봤던 마궁은 아닐까.

안내판에는 이 곳을 마조궁이나 마궁으로 부른다고 적혀있었다. 마궁은 마공시의 옛 지명이다. 천후궁은 팽호에서 가장 오랜 마조궁으로 3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녔다.

복건 미주서(湄州嶼) 출신 임묵(林默)이 본명인 마조신은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는 어부들의 기도가 효험을 보이며 차츰 신격화되었다고 전해진다. 만일 이방익이 이 천후궁을 찾은 거라면 험한 바닷길을 살아 건너온 그에겐 그 의미가 더욱 각별했다.

지난 4월의 천후궁은 도심 휴식처처럼 시민과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건물 안에선 발소리를 낮춘 채 저마다 향을 피우며 무언가를 빌고 있었다. 그들은 바닷길의 안녕만이 아니라 가족과 사랑하는 이의 건강과 행운을 기원하고 있으리라.

▶팽호의 역사에 등장하는 이방익=마궁대인을 만난 이방익은 '어디 사람이냐'는 질문을 받자 '조선국 전주부'사람이라고 답한다.

천후궁에서 간절히 기원하는 사람들.

쌀 장사를 하기 위해 배를 탔다가 표류했다고 둘러댄다. 그가 출신지를 잘못 알려준 건 광해군 때인 1613년 제주에 표류했던 유구 상선이 제주 사람들에게 해를 입은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이방익보다 앞선 장한철 '표해록'에도 비슷한 사례가 등장하는데 표류한 제주 사람들은 목숨을 건지기 위해 고향을 다른 곳이라고 알려준 일이 적지 않았다.

이방익과 팽호의 인연이 두드러지게 새겨진 곳은 마공시에 있는 팽호생활박물관이었다. 팽호의 역사를 시대순으로 소개한 전시물에 이방익이란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1796년 청 가경원년 조선 이방익 등 8명이 바람을 만나 팽호로 표류한 뒤 다음해 고국으로 돌아가 '표해가'를 지었고 이같은 행적은 특수한 경험이다'는 짤막한 글귀였지만 그 섬의 역사에 자리잡은 이방익의 존재를 짐작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방익은 팽호 제도 어느 섬에 표착했던 것일까. 취재팀은 그 흔적을 더듬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자문위원=권무일(소설가) 심규호(제주국제대 교수), 글·사진=진선희기자>

표류끝 살아남은 자들의 극적 회생
이방익도 비 내리고 고기 뛰어올라



풍랑에 떠밀려 바다를 헤매는 이들의 심경은 절박하다. 순한 바람이 불어 사람사는 땅으로 데려다주길 빌어볼 뿐이다. 살아남은 자의 기록인 표해록에선 그 과정이 한층 극적으로 그려진다.

마공시 원도심 골목이 정겹다.

이방익도 다르지 않았다. 지금의 대만 팽호도에 다다르기 전까지 울렁대는 바다 위에서 보내다 구사일생하는 기록 초반에 그 점이 잘 나타나 있다. 이방익이 작성한 원문을 필사한 자료로 추정되는 한글서사문 '표해록'의 일부를 따라가보자.

"점점 야심하고 풍랑은 갈수록 흉심하니 일엽어정(一葉漁艇)은 바람과 물결을 쫓아 가없이 흘러간다. 슬프다. 이 몸이 전생에 무슨 죄로 하직없는 이별인가? 사람의 죽음은 예사라지만 어복(魚腹)에 영장(永葬)하다니 이렇듯 원통할 수가 없구나. 부모처자가 내가 돌아올 것을 손꼽아 기다리는 거동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망극하다. 하루 이틀 굶어가니 기갈은 매우 심해지고 살 길이 망연하다."

작은 고기잡이 배를 타고 물빛을 즐기던 이방익과 그 일행들의 절망감이 그대로 드러난다. 하늘도 감동했던 것일까, 이방익 일행이 정처없이 바다를 떠돈 지 4일 만에 큰 비가 내린다. 그들은 돛대에 매달려 떨어지는 빗물을 받아먹으며 갈증을 달래지만 입에선 피가 나고 복통은 심해진다. 사방을 분간못하니 날이 새면 낮인 줄 알고 어두우면 밤인 줄 알 뿐이다.

이방익은 '표해록'에서 5~6일 식음을 전폐하던 그들 앞에 한 척이 넘는 고기가 뛰어들었다고 했다. 드라마틱한 장면이다. 그들은 생선을 산 채로 8등분해 나눠 먹으며 또 한번 고비를 넘긴다.

"하늘이 도우셨나 해신이 주신 것인가? 이 고기 아니었으면 죽기 직전의 우리 8인이 어찌 살 수 있었을까 서로 울면서 고마워했다."

표류한 지 16일째, 마침내 그들 앞에 큰 섬이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미 이 때는 돛대와 키마저 잃은 상태였다. 다시 풍랑에 몸을 맡겨야 하는 처지에서 그들은 기적적으로 섬 북쪽 언덕에 닿는다. 진선희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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