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택의 한라칼럼] 황룡사 9층목탑과 용담동 제사유적을 통해 탐라를 만나다

[문영택의 한라칼럼] 황룡사 9층목탑과 용담동 제사유적을 통해 탐라를 만나다
  • 입력 : 2019. 11.19(화) 00:00
  • 김도영 기자 doyoung@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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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부터 시작된 제주예술제는, 1965년 한라문화제로, 2002년 탐라문화제로 불리고 있다. 제주는 경주처럼 고을의 의미이고, 탐라는 신라처럼 나라의 의미 때문일 것이다. 3세기에 편찬된 삼국지위지동이전의 한 대목이다. "마한의 서쪽 바다 가운데 큰 섬이 있는데 주호라 한다.… 그 섬사람들은 배를 타고 한(韓)나라와 중국과 왕래하며 장사를 한다." 앞글 속 주호라는 섬은 탐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제주도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선덕여왕은 신라를 위협하는 주변 9개국을 제압해 조공을 바치게 하겠다는 염원으로 황룡사 9층목탑을 645년에 세웠다. 4층에 언급되고 있는 나라가 '탁라(托羅)'인데, 이는 탐라의 또 다른 이름이다. 필자는 삼국에 가야와 탐라를 더해 5국시대라 칭해본다.

넓은 영토와 강한 군사력을 가졌던 고구려, 곡창지대에 위치해 경제·문화가 앞선 백제, 두 나라에 비해 영토도 작고 발전도 늦은 신라가 3국을 통일한 배경이 궁금하다. 선덕여왕이 세우게 한 80m나 되는 황룡사 9층목탑에는 층마다 신라를 괴롭히는 주변국들인 일본, 당, 오월, 탁라, 백제, 말갈, 거란, 여진, 고구려의 이름을 새겼다 전한다. 지금의 경주인 서라벌 어디서나 눈에 띄는 황룡사 9층목탑을 건축한 것은, 마음을 모으면 더욱 강해질 수 있다는 비전과 꿈을 신라인과 공유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렇듯 신라의 통일 뒤에는 황룡사 9층목탑과 폐족이 없던 김춘추와 김유신 등의 인재등용, 그리고 보급로 제안 등을 통해 결성된 나당연합이 있었다. 그리하여 신라는 660년 백제를, 668년 고구려를 물리쳐 삼국을 통일했던 것이다.

신라로 향했던 시선을 다시 제주로 향한다. 용담동 제사유적은 제주향교 서북쪽 담장 너머에 있다. 하지만 이를 알리는 안내판이나 표지석은 아직 없다. 1992년 이 지역을 발굴조사 했던 제주대박물관(관장 이청규) 조사팀은 수백 점의 통일 신라시대의 회색도기, 옥(玉)제품, 금동혁대, 당의 청자(주전자) 등의 고급유물들을 수집했다. 당시 제주에서는 생산되지 않아 수입했던 도자기 파편들은 대부분 깨어진 채로 1000년 이상을 이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곳은 탐라국이 바다로 배를 띄울 시 항해의 안녕을 비는 제사행위가 행해졌음을 시사하는 고고학적 증거들이 발견된 유적인 셈이다. (이곳은 탐라국 지배층의 무덤군이라는 설도 전한다.)

제사유적 등이 발견된 장소에는 그 흔한 안내판 하나 없다. 제주의 정체성과 역사문화를 대하는 우리의 현주소를 보는 듯하다. 우리의 역사문화를 담아내고 이를 실현하는 참다운 지도자가 더욱 필요한 요즈음이다. 경청을 잘하고 소통을 잘하고 구현을 잘하는 사람이 배려와 상생의 미래가 담겨있는 더 멋진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은 세상의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해답이 보이지 않을 때면 나는 정체성과 창의성의 보고인 역사문화에서 이를 찾으려 한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발상의 전환은 누구에게나 손짓하는 행운의 여신이 짓는 미소이리라. <문영택 사단법인 질토래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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