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문규의 특별기고] 탐라의 종은 언제 다시 울리나

[강문규의 특별기고] 탐라의 종은 언제 다시 울리나
  • 입력 : 2022. 07.04(월) 00:00
  • 최다훈 기자 orca@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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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요즘 세대들에게는 혹, 낯설지도 모르지만 헤밍웨이의 원작인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는 한 시대를 풍미한 명화였다.

이 영화는 서구문물에 익숙치 못한 1960년대 젊은이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었다. 일세를 풍미했던 남녀 주인공 게리 쿠퍼는 너무 멋졌고, 잉그리드 버그만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탐라의 종에 관한 이야기도 많다. 1990년대 초 제주시는 목관아 터를 허물어 지하 2층 300대 수용 규모의 주차장을 조성하겠다고 나섰다. 그러자 천년의 사적지를 파괴해서는 안된다는 거센 반발에 부딪혀 사업은 백지화됐다. 그 후 10년 가까운 발굴 작업을 거쳐 2000년대 초 마침내 옛 관아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종루(鎭海樓)는 복원했는데 어쩐지 20년이 가깝도록 종은 보이지 않고 있다.

탐라의 종에 관한 기록은 차고 넘친다. 1435년(세종17) '홍화각기'는 제주목관아가 소실되자 다음해 안무사 최해산이 관아를 복원한 경위를 적은 글이다. 이 때 종루(鍾樓)를 설치한 사실이 나타난다.

1392년 건국한 조선은 제주목을 설치할 때 새로 관아를 지었거나 읍성을 축조했다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최해산 목사 때 소실된 목관아는 탐라시대부터 이어져 온 옛 관아를 승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불타버린 종루나, 그 속에 설치된 종 역시 다르지 않다.

1699년 남지훈 목사는 종루를 개건(改建), 이 누각에 옛 묘련사의 종을 구입해 매달아 백성들에게 시각을 알리게 했다고 한다.

1703년 이형상 목사가 남긴 '탐라순력도'에는 외대문의 문루에 종과 북이 선명히 그려져 있다. 18세기 후반에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탐라방영총람'에도 외대문에 종이 걸려 있음을 알게 한다.

종에 관한 기록은 계속된다. 1847년 이의식 목사는 종에 금이 생겨나자 이를 녹여 화로와 무기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듬해 새로 도임한 장인식 목사는 "역사가 오랜 탐라고도(耽羅古都)에 종이 없으면 안된다"며 전라도 영암 미황사에 있는 큰 종을 900냥에 사들였다. 무게 500근에 높이 2척, 둘레는 5척3촌 등이라고 세세히 기록해 놓았다. 이렇게 전해지던 종루는 1916년 일제에 의해 목관아가 허물어질 때 함께 훼철됐다.

해마다 송구영신의 시기가 되면 제야의 종소리가 울려퍼진다. 보신각 종 만이 아니다. 제주와 세종시를 제외한 전국 15개 시·도에서 타종행사가 열리고 있다.

제주도정은 전국에서 가장 앞선 시기에 목관아를 복원하고도 정작 관아의 생명력을 불어넣는 종 복원은 사실상 방치하고 있다.

제주목관아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이 안 된, 미완의 복원이다. 이제 갓 출범한 오영훈 도정은 탐라의 역사에 많은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 의지가 탐라의 종 복원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 울림이 대대손손 제주사회에 퍼져나가길 기대해 본다. <강문규 전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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