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수정의 목요담론] 을묘왜변과 제주의 관심

[오수정의 목요담론] 을묘왜변과 제주의 관심
  • 입력 : 2022. 07.07(목) 00:00
  • 김채현 기자 hakch@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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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화북포구에 있는 별도연대 위에 올라섰다. 북쪽 바다를 중심으로 지금의 제주항 끝에서 조천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아마도 조선시대 별도연대를 지켰던 별장과 연군들은 이 자리에서 왜구의 침입을 확인하고는 바로 전투 태세와 함께 연기를 날려 위급함을 알렸을 것이다.

1555년 6월 27일, 왜구 1000여 명을 실은 왜선 40여 척이 화북포구로 침입했다. 이때 당시 조선의 관문이었던 화북수전소는 함락됐고, 2시간 거리 남짓에 있던 제주목까지 침략해 들어왔다. 당시 김수문 목사와 민관으로 구성된 군사들은 3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승전보를 울렸다. 이 왜구들은 이미 전라남도 영암·강진·진도 일대를 침입했다가 퇴각하면서 그 일부가 제주를 침범한 것이다. 이 사건이 제주의 유일한 승전사인 을묘왜변이다.

을묘왜변이 일어났던 당시 일본은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전국을 평정하기 직전으로 매우 혼란의 시기를 거치고 있었다. 이런 자국 내의 혼란을 틈타 일본인들은 해상으로 나가 왜구가 됐다. 또한 제주 사회는 수년째 지속적인 흉년과 기근으로 피폐해 있는 상태였고,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왜구의 침입과 자체적 자강 능력이 부족했던 제주로서 을묘왜변의 승전사는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할 것이다.

왜구의 제주침입에 대해서 학자들 대부분은 제주의 해상지리적 위치에서 찾고 있다. 특히 제주는 일본에서 중국으로 가는 중간적인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왜구의 침입에 시달려야 했고, 중국의 상선들과 많은 이양선의 출몰로 자체 방어체계를 마련해야만 했다.

제주가 지리적 요충지로서 주목을 받았던 대표적 사례는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의 동남아 진출을 위한 전초기지로 활용됐다는 점이다. 그 결과 아시아권에서 가장 좁은 면적에 가장 다양한 군사시설이 구축됐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제주는 과거에서부터 최근까지 지정학적 요인 때문에 침탈과 억압의 역사를 품어왔고, 특별자치도라는 이름표에 제주 평화의 섬 역시 일제 강점기와 4·3 진상규명의 역할로 세계평화에 기여하고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정착시킨다는 정의를 담은 근거를 마련했다.

제주의 지리적 위치 때문에 올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사실 중에 현재의 평화의 섬으로 오게 된 인과관계에는 과거 제주도민의 왜군이나 이양선의 침입에서 평화를 지켰다는 것도 분명 한몫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조선시대 왜구들과의 전투가 현대의 굵직한 역사에 가려 관심 밖의 사건으로 머물러 있다는 모습을 보면서 지금까지 이런 과거사에 대한 콘텐츠 작업이 너무 부족했다는 아쉬움이 앞선다. 앞으로는 단순히 과거사의 한 장면, 문화유산의 하나로서만 머물 것이 아니라, 현대를 거슬러 올라 다양한 콘텐츠로 확장하는 작업이 분명히 있어야 할 것이다. <오수정 한산부종휴선생기념사업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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