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제주살이] (51)해녀와 함께

[황학주의 제주살이] (51)해녀와 함께
  • 입력 : 2022. 09.13(화) 00:00
  • 김채현 기자 hakch@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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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동년배 해녀 친구가 한 명 있다. 어느 해 허영선 시인이 시집 '해녀들'을 내고 늙은 해녀와 약속이 있다고 해서 동복 해안가에 함께 간 적이 있다. 그때 만난 해녀의 모습과 그 자리에서 들었던 해녀의 노래에 흠뻑 빠진 나는 그 후 사용하지 않는 해녀탈의실을 개인 작업실로 임대해 쓰면서 종종 어촌계와 해녀의 집을 드나들게 되었다. 동네 해녀인명사전 같은 걸 만들 때 거들며 알게 된 상군 해녀이다.

그녀의 집엔 바다를 볼 수 있는 낡은 나무 의자가 마당에 있고, 빨랫줄엔 빨래집게에 매달린 잠수복이 마르고 있다. 그 고무옷 궁둥이에 고무풀로 동전만한 구멍을 때운 흔적이 있다. 초가을 볕이 말랑말랑해지는 조용하고 편안한 시간 귀퉁이, 우리는 색깔이 예쁘게 마른 미역 냄새 감도는 제주의 가을 마당에 골판지를 깔고 앉았다.

아니한가. 감태밭 위를 유영하며 미소 짓는 늙은 해녀의 웃음은 해녀만이 알지 않을까. 바다와 살아야겠구나, 생각되던 젊은 시절엔 돈 나올 데가 없어 바다에 들어갔지만 요즘은 바다가 정답더라고 한다.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은 숱한 시간을 넘기고 나자 여기가 내가 살 곳이었고 살 만한 곳이었다는 생각이 든단다. 세월이 휘젓고 떠나간 그 뒤편에서 호이호이 하는 숨비소리가 듣고 싶어 바다에 나가지 않고는 못 배기는 늙은 해녀에게 가장 은혜로운 대상은 바다이며 바다의 여신이라고 했다.

관도 수의도 없이 물질하던 잠수복 차림 그대로 저승으로 옮겨가 돌아오지 않는 해녀도 여럿 봤지만, 그래도 바다에 가면 모든 걸 잊어버릴 수 있다고 했다. 일곱 살 때 물질을 배워 60년을 바닷속에 드나들었으니 머릿속은 늘 뱅글뱅글 레코드판 돌아가는 것처럼 어지럽고 두통을 달고 살지만 바다를 좇아 다다른 곳에 바다의 여인, 해녀의 늙은 시간이 와 있다. 그녀는 전복 한 접시를 썰어서 내온다. 그리고 말한다. 스스로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이렇게 살아서 그래도 세상에 큰 폐는 되지 않았다는 것이 감사하다고.

귤농사도 짓지만 귤밭도 이미 다 자식들 앞으로 줘버렸고, 이제 가진 것도 없다고 했다. 주고 싶은 것이 있으면 살아 있을 때 주어야 그 물건도 빛이 난다. 그렇지 않으면 버리고 가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해녀들은 누구나 자신의 숨의 한계를 안다. 그래서 숨의 마지막에 이르기 전에 물속에서 올라온다. 아무런 장비 없이 바다 안에 머물 수 있는 것은 오직 숨을 멈추는 것뿐이며 나의 숨만큼, 숨의 길이만큼 머물 수가 있다. 그래서 물속에서 배운 건 욕심을 버리는 일이었다.

제주엔 지금 4000여명의 해녀가 있다. 바다가 황폐화 되자 해녀들도 전보다 반으로 줄었다. 그만큼 걷어올 수 있는 수확물이 없기 때문이다. 먼 훗날 언젠가 누군가는 제주의 마지막 해녀가 되고, 제주 해안은 서핑 보드를 타고, 다이빙을 하는 관광객들만의 장소가 될지도 모른다. <시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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