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실의 하루를 시작하며] 아픈 언어와 사회

[이종실의 하루를 시작하며] 아픈 언어와 사회
  • 입력 : 2022. 11.23(수) 00:00
  • 김채현 기자 hakch@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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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 고등학교 정치경제 시간에 처음 들었던 '그레셤의 법칙'이다. 다른 실질 가치를 지닌 두 화폐가 동일한 가치를 갖고 함께 유통되는 경우, 악화(가치가 낮은 화폐)가 큰 세력을 지니고 유통되면서, 양화(가치가 높은 화폐)의 유통을 막고 구축한다(쫓아낸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금화와 은화가 같은 지불적 가치를 지닐 때, 사람들은 은화는 사용하며 내치고 금화는 보관하려 한다. 그러면 은화는 두루 사용되고 금화는 주인의 금고 속으로 숨게 되니 화폐의 유통적 기능은 은화가 주도하게 된다. 사람의 심리가 악의 지배에 영향을 미치는 게 재미있다고 느꼈다. '양화'와 '악화', '구축' 같은 고급진 어휘들을 되뇌면서 우쭐하기도 했었다.

악(惡)이 양(良)을 이긴다는 이 법칙은 다른 분야에서도 통하는 것 같다. 요즘에는 실제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예를 보기 어렵다. 그런데, 정보와 문학, 예술과 문화 등 사회 전반에서 이런 예가 많이 보인다. 자극적인 뉴스가 사실만 전하는 소식보다 더 청취율이 높고, 편파적인 정보가 중립적인 것보다 더 공유되고 잘 옮겨지며, 대중적이고 통속적인 문학이나 예술이 사람들의 이목을 더 끈다. 사회적으로는 선동적 구호와 사악한 주장을 펴는 무리가, 원칙을 중시하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집단에 우위를 보인다. 이런 현상은 어지러운 시대의 단면으로서 바람직하지 않다.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은 우리말의 현실에서 더 많이 보인다. 한 예로, 종편과 공영 텔레비전 방송의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국적 불명의 합성어는 물론이고 원어민이라 해도 전문가만이 알 법한 외국어와 그 축약어들까지 마구 쓰인다. 우리말의 어휘를 비틀거나 틀리게 쓰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자막의 표기까지도 틀리기는 마찬가지다. 시청자들은 망설임이나 거리낌이 없이 이에 호응한다. 언어는 약속이고 습관이다. 이런 잘못된 쓰임은 굳어지면서 양질의 우리말 어휘를 몰아낼 수 있다. 우리말이 이처럼 아픈데, 이를 못 느끼거나 이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우리의 말과 사회가 건강했으면 좋겠다. 언어가 아픈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다. 건강하지 않은 사회는 그 언어가 불량하다. 우리의 말과 사회가 이런 악순환을 겪고 있다. 먹기 쉬운 즉석식품이 건강에는 좋지 않은 것처럼, 경솔히 잘못 쓰는 어휘가 우리말을 해롭게 하고 있다. 그런 말들이 많이 쓰일수록 우리의 말과 사회는 더 아파 간다. 언어를 건강하게 하려면 말을 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우리말이 건강을 되찾는 일을 한시바삐 시작해야 한다. 옷이 몸을 가리고 보호하는 기능에 멋까지 더해야 제 역할을 하듯이, 언어도 의사의 표현과 전달의 기능에다 멋을 지녀야 한다. 우리말의 멋을 회복시켜 주기 어렵다면 이를 추하게 하는 일이라도 멈추자. 아름답고 수준 높은 언어의 사용으로 우리말과 이 사회에 품격을 입히자! <이종실 (사)제주어보전회 이사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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