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언어의 갈라파고스 19] 2부 한라산-(15)백록담은 호수라는 뜻

[제주도, 언어의 갈라파고스 19] 2부 한라산-(15)백록담은 호수라는 뜻
제주어 형성과정 담긴 '백록담'은 고대어의 화석
  • 입력 : 2022. 12.06(화) 00:00
  • 김채현 기자 hakch@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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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백록담은 흰 사슴이 물을 마시며 놀았던 곳이라거나 신선이 백록주를 마시며 놀던 곳이라는 식의 풀이에 강하게 세뇌된 상태라면 이 말이 '호수+호수+호수'로 이뤄졌다는 설명을 수긍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살아있는 언어가 아니라 화석화된 언어다. 생물학자라고 해도 화석만 보고 바로 그 생물의 실체를 알아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제주인은 누구?..제주어 속의 비밀코드


백록담은 호수라는 뜻이다.(그림 채기선)

호수를 '노루'라고 쓰는 사람들이 제주도에 도착했을 때 한라산 정상의 큰 호수를 현지인들이 '바쿠'라고 부른다고 가정해 보자. 이들은 이 명칭을 받아들이면서 자기들 방식으로 호수임을 나타내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니 '바쿠'라는 말이 호수를 의미하는지를 알았던 몰랐던 그 말 다음에 호수를 의미하는 '노루'를 붙였을 것이다. 그러면 자연히 '바쿠노루'가 되는 것이다.

'노루'란 말은 위에서 밝혔듯이 현대 몽골어에서도 그대로 쓴다. 몽골 사람들과 대화해 보면 호수는 우리 발음과 매우 유사하게 '노루'라 하는 것이다. 한자 '록(鹿)'은 사슴 록 자다. 이 록(鹿) 자는 원래 화려한 뿔과 머리와 다리까지 사슴을 그린 상형문자라는 것은 맞다. 그러나 점차 사슴의 종류는 물론 사슴과에 속하는 짐승을 통칭하거나 사슴의 특징과 관련된 의미를 표시하게 됐다. 그러므로 당연히 노루를 나타낼 때도 이 사슴 록 자를 쓰게 되는 것이다. 어떤 한자를 잘 아는 관리가 제주도에 와서 '바쿠노루'라는 말을 듣고 문자로 표기한다고 상상해 보자. 이 관리 또한 그 의미를 알았던 몰랐던 한자식으로 '바쿠노루'를 '백록(白鹿)'이라고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백록이라고 쓰고 보니 이 말엔 호수의 의미가 없지 않은가? 따라서 이 명칭이 지시하는 것은 호수이므로 호수를 나타내는 '담(潭)'을 덧붙였을 것이다. 이렇게 오늘날의 '호수+호수+호수'의 의미를 담은 '백록담'이란 명칭이 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같은 의미를 연달아 쓰는 현상을 언어학에서는 첩어라고 한다. 두 단어를 연달아 쓰는 이중첩어는 흔하다. 그러나 이 경우는 삼중첩어의 사례가 된다. 삼중첩어란 너무 억지가 아닌가 하고 반발할 수 있지만 심지어 사중첩어도 있을 수 있다. 만약 호수 호(湖)를 덧붙일 필요가 생긴다면 백록담을 '백록담호'라고 할 것이다. 영어로 표기한다고 해 보자. '백록담 레이크'라고 하게 될 것이다. 그럼 이들은 사중첩어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백록담'이라는 지명 속에는 제주어의 형성과정이 보존돼 있는 것이다.



중앙아시아어 ‘노루’가, 왜 백록담에?


이런 현상은 우리말에만 있는 게 아니다. 네오르 호수(Neor Lake)가 있다. 이란 북서부 아제르바이잔과의 국경 근처 바그루 산맥의 아르다빌에서 48㎞ 떨어진 곳에 있는 호수다.

부리야트 사람들의 순록 사냥(1890년대 촬영, 이르쿠츠크대학 박물관 소장)

이란어로 호수는 네로(Neor), 노르(Noor), 누르(Neur) 등이 있다. 골루(Golu)라고도 한다. 그런데 네오르 호수는 Neur Lake, No-ur Golu, Neour Lake라고도 한다. 모두 호수를 나타낸다. 모두 '호수+호수'의 구조다. 사실 호수를 노르라고 하는 것은 중앙아시아 전반에 걸쳐 있다.

한편, 위에서 설명한 한자를 빌려다가 작명하는 방식 외에도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즉, 백록을 한자 백록(白鹿)으로 썼는데 이걸 한자음으로 읽으면 당연히 '백록'이고 뜻은 '흰 사슴'이 된다. 그러면 한자의 음과 뜻을 그대로 빌려 쓴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차용한 한자를 음독자라 한다. 그러나 '白鹿(백록)'이라고 썼으되 그 원래의 뜻인 '바쿠노루'라고 읽는다면 '호수+호수'가 될 수 있다. 물론 '노루'를 짐승 노루로 볼 것인가 아니면 호수 노루로 볼 것인가는 문제가 된다. 이렇게 똑같은 단어인데 뜻이 달라지는 것을 동음이의어라고 하며 많이 나오는 언어 현상의 하나다. 최초로 '백록'이라고 쓸 당시의 생각은 이처럼 한자를 본래의 뜻으로 읽고 그 본뜻도 살려서 차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차용한 글자를 훈독자라 한다. 이런 뜻을 소홀히 한 채 백록을 '흰 사슴'이라고만 고집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해석이다.



역사기록의 빈칸은 언어학적 증거로 보완


그럼 짐승 노루의 어원은 무엇이냐고 물을 수 있다. 노루는 원래 알타이어권의 여러 언어에서 '로루'라는 어원을 공유하면서 출발하는 말로 보고 있다. 퉁구스어에서 '로르-'는 암컷 사향노루 혹은 노루를 지시한다. 예를 들면 에벤키어에서 '나로스', '노르스' 또는 '네레스'가 암컷 사향노루를, 만주어에서 '로루-'가 짐승 노루를 지시한다. 그런데 일본어의 경우 고대 일본어에서는 '너러~누아루아'가 노루를 의미한다. 오늘날의 일본어에서는 노로, 노루, 노로지카(ノロ, ノル, ノロジカ; noro, norojika)라고 해 우리말과 거의 같다.

여러 사례에서 일본어는 국어가 일본으로 건너갔다거나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열도로 흘러 들어간 언어로 보고 있다. 이 경우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만주 일대에서 한반도로 이동한 일파와 만주에서 일본으로 직접 이동한 일파가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국어의 형성과정은 물론 제주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제주인은 누구인가, 그들은 어디서 왔는가 같은 기초적 물음에 대해 기본적으로는 역사기록이 중요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민족의 형성과정이 모두 역사에 기록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매우 한정적이다. 그러므로 고고학적 자료를 동원하게 되고 그것도 모자라면 언어학적 증거로 보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에 대한 대답을 준비하지 않은 채 제주어를 논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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