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기성세대들이 청년들을 향해 정치와 사회 문제에 관심이 없다며 그 삶의 자세에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특히 60년대 4·19를 경험했거나 79년부터 80년대에 걸친 일련의 민주화운동을 경험했던 세대들은 지금의 청년들을 향해 개인적이고 이기적이라며 미래를 우려하는 목소리를 내곤 한다. 그러나 반세기가 넘도록 기성세대들이 외쳐왔던 민주주의에 따른 삶의 질은 지금의 청년들에게 혜택이라기보다는 부담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지금의 문제들은 결국 기성세대가 청년들에게 떠넘긴 장식(裝飾)이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태평성대를 말할 때 요임금의 고사와 '격양가(擊壤歌)'를 인용한다. '격양'이라고 하면 '땅을 치며 통곡하다'의 이미지와 연결돼 태평성대와 어울리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지만, 여기서 '격'은 '두드리다'의 의미로 해석해야 옳다. 그러므로 '격양'은 흥겨운 노래와 어울리는 몸짓이다. 고사는 요임금의 미행(微行)에서 만나게 되는 노인의 태도를 통해 태평성대의 의미를 전한다는 내용이다. 태평성대란, 바람직한 정치의 결과란 백성들이 정치·사회에 대해 걱정이 없는 상황을 뜻한다. '함포(含飽), 고복(鼓腹), 격양(擊壤)'이면 그만이다.
우리 대한민국의 헌법 전문은 하나의 문장이다. 340자가 넘는 낱말들이 이어진 단 하나의 문장으로 돼 있다. 여기에 '4·19'의 의미가 명명돼 있다. '불의에 항거한 민주이념'이다. 헌법 전문에 이렇게 명명됐다면 국경일로 공휴일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4월 19일은 아직도 국경일로 지정되지 못했다. '4·19'의 의미는 학생과 시민이 중심이 돼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의 부정에 저항하며 민주주의 이념을 지켜내기 위해 일어나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이루어 낸 혁명적인 운동이다.
'4·19'를 주도했던 청년들 그리고 1979년 '부마항쟁'으로부터 80년대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청년들이 오늘 80세, 70세, 그리고 60세를 넘기고 있는 기성세대들이다. 우리 현대사의 주역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기성세대들이 부르짖던 '불의에 대한 항거', '민주이념의 쟁취'를 생각한다면 지금 청년들에게는 그들이 기득권이고 당시의 저항과 쟁취의 얼굴이 아니라 타파의 대상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기성세대들은 오늘의 상황이나 처지를 고려하지 않고 청년들을 나무라고 비난하기에 급급하다.
'4·19'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오늘, 우리의 정치·사회의 모습이나 그토록 추구하는 민주의 이념이 제자리라고 말하는 청년들에게 기성세대들이 어느 시인의 말처럼 "멀리 있는 것은/손에 닿을 수 없는 까닭에/아름답다"라고 한다면 요즘 청년들은 땅을 치며 통곡할지도 모르겠다. 60년대 80년대 눈물범벅이던 날들이 훈장은 아니다. 그때의 자세로 오늘의 문제에 대응하는 기성세대들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오늘도 시급 만 원도 안 되는 일을 위해 청년들과 학생들은 일터로 나가야 한다.<좌정묵 시인·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