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詩읽는 화요일] (34)당신과 먹는 점심-김창균

[황학주의 詩읽는 화요일] (34)당신과 먹는 점심-김창균
  • 입력 : 2023. 09.12(화) 00:00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갈 길 멀다는 아버지를 앉혀 놓고

터미널 부근 백반집에서 점심을 먹는다

콩의 시절을 기억하는 두부와

파도의 기억을 가진 미역국을 한 술 뜨며

지루하게 시간을 끌고 가는 시계를 외면한다

말(言)이 절벽을 뛰어 내리는 비명처럼

목구멍 속으로 뛰어 내릴 때마다

두부 모서리도 같이 뛰어내려

출렁, 밥알 그득 담긴 입은 서먹서먹하다

애써 말문을 막아내는 밥알들이여

오랜 가뭄에 온몸이 주름투성이가 된 상추에

말의 글썽거림 같은 것을 싸 당신께 건네며

맵디매운 고추가 열리는 식당 옆 텃밭에 오래 눈길을 준다



그리고 소리 나지 않게

당신에게 하고픈 말들을 자꾸

밥그릇 귀퉁이에 밀어

밀어 붙인다.

삽화=써머



삶의 물리적인 시간이 겹치면서 어느 만큼 함께 늙어가는 부자(父子)가 백반집에 앉아 있습니다. 저마다의 시대를 살아가지만 일정한 기억을 공유하고 같은 체험을 품고 있어서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되려 점심을 먹는 오늘, 부자를 서먹하게 하고 말문을 막습니다. 가족이란 본디 하나가 되는 것에 성공할 수 없는 운명에 한 줄로 매달려 있습니다. 그것이 가장 외로운 일의 하나로 다가올 때 하고픈 말들은 밀려납니다. 그 어느 가장자리에서 "주름투성이가 된 상추에/말의 글썽거림 같은 것을 싸 당신에게" 겨우 건넬 수 있습니다. 당신과 나의 세상은 단지 한 걸음 차이인 시차를 밟고 서 있는 낡아가는 버스 터미널 주변이며 당신이여, 시선은 매운 고추 텃밭을 더듬지만 눈빛엔 뭉근하게 불이 지펴지는 시간입니다. <시인>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5900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