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넘는 역사를 지닌 필방인 '구하산방'. 진선희기자
서울시 2013년 '마스터플랜' 세우고 10년 동안 미래유산 정책최근까지 504건 발굴… 표식 지원이 전부지만 "삶의 표창장"전국 지자체 11곳 조례 제정 비문화재인 미래유산 가치 주목
[한라일보] 중년의 여성들이 휴대전화를 들고 '찻집 귀천' 앞에서 연신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그들은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란 시의 한 대목이 흘러나올 듯한 그곳에 오래도록 멈춰 섰다. 지난 8일 서울 인사동. 서귀포미래문화자산추진단 일행도 1985년에 문을 열었던 찻집을 쉬이 지나치지 못했다. 그곳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으며 이젠 하늘로 돌아간 천 시인과 아내를 떠올렸다.
이날 제주 방문단이 인사동으로 향한 것은 '서울 미래유산'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서귀포시와 서귀포시문화도시센터는 문화도시 사업의 하나로 시민 공모를 하고 서귀포미래문화자산추진단을 거쳐 2021년부터 미래문화자산을 선정해 왔다. 2021년 5건 15개, 2022년 6건 19개의 미래문화자산을 추렸고 올해도 조만간 새로운 목록이 더해질 예정이다.
전주 미래유산 중 하나인 '어은쌍다리’.
'서울특별시 미래유산 보존·관리 및 활용에 관한 조례' 따르면 '미래유산'은 "근현대 서울을 배경으로 다수 시민이 체험하거나 기억하고 있는 사건, 인물 또는 이야기가 담긴 유·무형의 것으로서 서울특별시 미래유산보존위원회가 미래세대에 남길 만한 가치가 있다고 인정한 것"을 일컫는다. 다만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지정·등록된 문화재는 제외한다.
현재 서울시는 시민공모·전문가·서울시·자치구 제안 등 여러 통로로 미래유산을 접수하고 있다. 후보작은 정치역사, 산업노동, 시민생활, 도시관리, 문화예술 분과 등으로 구성된 미래유산보존위원회 심의에 올라 최종 대상이 가려진다.
서울 미래유산은 2013년 서울시와 서울연구원에서 마스터플랜을 세우며 본격적인 출발을 알렸고 미래유산 홈페이지 개설, 홍보·체험 프로그램 운영, 아카이브 자료 조사, 민간단체 지원 사업 공모 등이 이어졌다. 미래유산 소유자나 관리자 동의를 얻어 인증서 발급과 표식이 설치된 때는 이듬해인 2014년이고 미래유산보존위원회 설치·운영 근거 등을 명시한 미래유산 조례가 공포된 해는 2015년 7월이다.
'찻집 귀천'을 찾은 이들이 입구에서 휴대전화로 추억을 담고 있다.
지난 10년간 발굴한 서울 미래유산은 동산, 부동산, 자연물, 생활문화, 예술활동, 자료 등 504건에 이른다. 이 가운데 7건은 국가·지방문화재로 지정돼 인정 해지됐고 4건은 우수건축자산으로 중복 선정된 사례가 있다. "과거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막을 수는 없지만 늦출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라는 고민을 안고 운영해온 서울 미래유산은 시대별, 주제별 특성에 따른 도보 답사 프로그램이 가동되고 돈의문박물관 안에 미래유산 홍보관을 조성하는 등 시민들과 접점을 모색해 왔다. 역사·교육·문화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반달'의 윤극영 가옥, 서울생활문화센터도 잇따라 개관했다.
서울 미래유산 통문관 전경.
이 중에서 '찻집 귀천'이 있는 인사동 일원에선 4시간이 소요되는 10개 걷기 코스로 미래유산을 체험할 수 있다. 서귀포미래문화자산추진단은 그 일부를 돌아봤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예 화랑인 '통인화랑', 인사동 약속 장소였던 '수도약국', 100년 넘는 역사를 지닌 필방인 '구하산방', '우리나라 고서의 보물 창고'로 불리는 '통문관' 등이 그곳이다.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서울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그것들에 얽힌 기억 하나쯤 있겠구나 싶었다.
서울 미래유산은 인사동만이 아니라 일상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다. 해장국집, 칼국숫집, 이발소, 막걸리 등이 미래유산에 들었다. 매장 입구에서 사진만 찍고 돌아가는 사람들 때문에 미래유산 표식을 붙이는 걸 꺼리는 곳이 있다지만 그렇지 않은 데가 더 많다. 생존을 위해 힘겹게 가게를 꾸려왔던 이들은 미래유산 표식을 주목받지 못했던 지난 삶에 주는 보상과 같은 '표창장'으로 여긴다. 어떤 곳은 미래유산을 자랑스럽게 생각해 표식을 하나 더 부착한 경우도 있다. 서울시가 미래유산 소유자 등에 지원하는 내용은 표식 제공 외에는 별도로 없다.
서울 미래유산 표식.
'이방인의 도시' 서울에서 도시의 향토성을 찾기 위한 여정으로 걸음을 뗀 미래유산은 차츰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지금까지 미래유산 조례가 제정된 지자체는 서울, 전남, 대전, 부산 등 광역과 기초를 포함 11곳으로 나타났다.
전주에는 '전주 미래유산'이 있다. 지난해 전주시와 (사)무형연구원이 공동으로 펴낸 '전주의 추억을 찾아서'에는 '전주 미래유산' 43선이 소개됐다. 옛 성곽을 중심으로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전주는 도시를 배경으로 다수의 시민이 기억하고 있는 사건, 인물, 이야기를 총망라한 유·무형유산을 대상으로 미래유산을 정해 왔다. '남부시장', '삼천동 막걸리골목' 등 전주의 맛을 대표하는 유산 한편에 '어은쌍다리' 같은 곳이 있다. 어은골의 '어은쌍다리'는 차량 통행이 늘며 다리를 새로 놓았지만 기존 것을 헐지 않고 지역주민들의 이동 통로로 사용 중이다. 낡은 다리는 2011년 철거 예정이었지만 50년 넘게 주민들과 함께해 온 만큼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받으며 '쌍다리'로 살아남았다.
서귀포시미래문화자산추진단 일행을 대상으로 '서울 미래유산 마스터플랜'을 발표한 민현석 서울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서울 미래유산을 문화재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비문화재이고 없어져도 상관이 없다"면서 "유산 자체를 보존하는 것보다는 시민의 기억을 미래로 전송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문화재에 대한 부담감으로 오히려 문화유산의 멸실·훼손을 야기하는 문제점을 의식한 것으로 서울 미래유산은 전문가 중심의 근현대 문화유산 보호 관리를 벗어나 시민사회의 폭넓은 이해와 참여 기회를 확대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고 덧붙였다.
민 연구위원은 지난 10년간의 미래유산 정책 진단에서 "자발적인 문화유산 보존·활용 의지를 고취하기보다는 미래유산 발굴, 인정 중심의 정책 수행으로 또 다른 문화재라는 혼란을 줬다"며 앞으로 보존을 넘어 향유의 대상으로 'S(서울) 콘텐츠'의 원동력이 되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글·사진=진선희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