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언어의 갈라파고스 65] 3부 오름-(24)거린사슴의 사슴, '수리'형 지명어

[제주도, 언어의 갈라파고스 65] 3부 오름-(24)거린사슴의 사슴, '수리'형 지명어
거린사슴은 짐승이 아니라 '급경사가 있는 오름'
  • 입력 : 2024. 01.23(화) 00:00
  • 송문혁 기자 smhg1218@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거린사슴, 갈라진 사슴? 사슴 모양을 한 오름이 갈라져?


서귀포시 대포동 산 2-1번지다. 1100도로 영실입구에서 서귀포 방향 3㎞ 지점에 있다. 이 오름으로 인해 도로가 급경사를 이루고, 이곳 전망대에서 보는 경치가 일품이어서 행정 구역보다는 그저 거린사슴으로 잘 알려졌다.

표고 742.9m, 자체높이 103m, 저경 876m, 둘레 2258m의 비교적 큰 오름이다. 원래는 3개의 봉우리던 것이 도로가 나면서 하나가 분리된 듯 보인다. 대부분을 차지하는 나머지는 분화구가 서쪽으로 조금 벌어진 형태다. 여기에서 연장되는 남서사면은 광활한 목장지대를 이룬다. 오름의 서쪽 계곡에 연해 있는 곳은 절벽이라 할 만큼 급경사를 이룬다. 주봉은 북측 봉우리로서 세 봉우리 중 가운데에 해당한다.

서쪽에서 바라본 거린사슴, '갈려있다'라고 할 만한 지형 특징은 보이지 않는다.

이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 사슴이 살았다느니, 오름이 두 개의 봉우리로 가려 있기 때문이라느니, 사슴 모양을 한 오름이 갈려 있다는 데서 붙은 이름이라고 해설하고 있다. 서귀포시지명유래집의 내용을 보자. "첫째는 북동에서 남서로 이어지는 세 봉우리의 능선이 어찌 보면 세 개의 작은 오름이 서로 어깨를 걸고, 나란히 있다는 것 같다는 점, 둘째는 옛날 이 오름에 사슴이 많이 살았고, 또한 사슴을 길렀다고 하여 불려지고 있다는 점, 셋째는 이곳의 봉우리들이 서로 갈라져 있다는 점에서 거린사슴이라 부른다고 한다." 이런 내용은 '거린'의 뜻을 '갈리다'로 봤다는 점, '사슴'을 '짐승 사슴'으로 봤다는 점에서 같다. 이렇게 나름의 상상력을 동원해 이야기를 생산해내는 현상의 바닥에는 지명의 구조에 대한 이해 부족이 작용하고 있다.





‘사슴’, 지리적 실체의 종류를 나타내는 지명어의 하나


지명이란 지명소 혹은 지명형태소라고 하는 요소로 되어있다. 여기에는 전부지명소와 후부지명소가 있다. 전부지명소는 고유요소라고도 한다. 후부지명요소는 속성요소라고도 한다.

급경사를 이룬 거린사슴의 서사면. 김찬수

그냥 축약해 전부요소와 후부요소라고 칭할 때가 많다. 전부요소란 다른 지리적 실체와 구분할 수 있게 해 주는 지명형태소를 말한다. 한라산의 '한라'는 백두산, 금강산과 같이 산에 속하지만, 이들과 구분되게 하는 요소다. 지명어의 앞부분에 위치하기 때문에 전부요소라 하는 것이다. 후부요소란 지리적 실체의 종류를 나타내는 지명형태소를 말한다. 한라산, 백두산의 '산'을 말한다. 지명어의 뒷부분에 위치하기 때문에 후부요소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후부요소란 산, 강, 호, 산맥, 평야같이 한번 성립하면 여간해서 바뀌지 않고, 쓰는 지역이나 언어사회가 광범한 것이 특징이다.

제주의 지명들은 사실상 후부요소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상태라서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러니까 지리적 실체의 종류를 나타내는 말의 뜻조차도 모른다는 것이다. 예컨대 거린사슴이 맞는가, 거린사슴오름이 맞는가도 아직 모르는 단계라는 것이다. 과연 고대인들이 이 오름을 부를 때 거린사슴오름이라 했을까? 그랬다면 전부요소는 '거린사슴'이 맞다. 이때 후부요소는 오름이 된다. 오름이란 지리적 실체의 종류를 나타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거린사슴오름이라고 했을 것이라 믿고 있다.

그렇다면 '거린사슴'이라는 전부요소의 뜻은 무엇인가? 위의 여러 해설은 이걸 전부요소라고 봐서 갈렸다느니 사슴이 살았다느니 심지어 사슴이 뛰어가는 모습과 닮았다느니 한다. 본란을 통하여 누차 소개한 바와 같이 '사슴'이란 '생', '싕', '숱', '삿', '싕', '슬', '세', '쉐', '시', '서' 같은 말의 하나다. 이 말은 '수리'에서 파생한 말이거나, 그 반대로 '수리'의 고어형이다. 이렇게 후부요소가 다양하게 가지를 친 사례는 많지 않다. 제주도 지역 내에서도 수많은 방언으로 분화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제주도 선주민 집단이 출신지가 다양하다는 점도 시사한다.





거린사슴, 북방기원의 지명으로 ‘급경사가 있는 오름’


이후 어느 한 시기 한자문화권의 기록자들이 제주도로 오면서 다시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들은 이 알아들을 수 없는 제주 지명을 나름의 방식으로 기록했다. 그러니 이미 후부요소가 있었는데도 이걸 전부요소라고 착각하여 그 지명어 끝에 이중으로 후부요소 예를 들면 '악(岳)' 같은 지명어를 덧붙인 것이다. 이런 오해는 세대를 거듭하면서 자손과 조상 간 소통이 단절되어 나름의 후부요소를 덧붙이면서 전승하기도 했다.

거린사슴의 '사슴'은 짐승이 아니다. 이 말은 위에 예를 든 '수리' 계열 중의 하나다. 제주어에 비추어 보건대 '수리'라는 말이 '삿' 계열의 어휘들과 기원이 같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솟다', '솟아오르다', '용솟음치다', '솟구치다' 같이 무수히 많은 어휘가 검색된다. 그중에는
'사슴'의 고어 형태인 '소삼'이라는 형태도 물론 있다. 17세기 '마경초집언해'라는 책에서 볼 수 있다.

'거린'이라는 말은 어떤가? 걸세오름 등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말은 급경사 혹은 절벽을 나타내는 말이다. 전부요소로서 수많은 오름이 있되 이 오름은 경사가 급한 지형이 있는 오름이라고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거린'이 들어있는 오름은 걸세오름(남원읍 하례리), 걸시오름(제주시 연동), 거린오름(거인악; 남원읍 한남리), 거린오름(안덕면 동광) 등에서 볼 수 있다. 이외에 한자를 동원하여 차자 방식으로 바뀐 이름 속에서도 '거린'을 볼 수 있다. '거리다'의 관형어로 보는 것은 현대어에서 유추한 것이다. 비록 사어가 됐지만, 제주 지명에서 절벽 혹은 급경사의 뜻으로 깊게 뿌리 박혀 있는 것이다. 이 말이 북방기원이라는 점은 이미 설명한 바다. 따라서 제주 지명에는 선주민이 누구며, 어떤 언어를 사용한 집단이었는지에 대한 정보도 들어있다. 거린사슴이란 '급경사가 있는 오름'이라는 뜻이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884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