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벵곳오름, 안좌오름으로도 부른다. 표선면 가시리 산8번지다. 표고 288.1m, 자체높이 113m, 둘레 2583m, 저경 896m이다. 제주도 오름의 평균 자체높이가 81m인 점에 비춰보면 작지 않은 오름이다. 그러나 인접한 지역에 따라비오름, 대록산 등 높은 오름들이 있어 크게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 해도 인근 오름들이 평평하거나 완만한 산세를 보이는 데 비해 이 오름은 봉우리가 뾰족하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한자표기를 어떻게든 해석해 보려는 허무한 지명 풀이들
이 오름의 이름도 미스터리의 집합체다. 입구의 안내 간판에는 봉황새가 자기 보금자리로 돌아온다는 봉귀악, 무기고와 닮았다는 병고악, 병의 주둥이 같은 형국이라 하여 병구악, 기러기가 둥우리에 앉았다 하여 안좌오름이라는 지명이 유래한다고 쓰여 있다. 한자표기를 어떻게든 해석해보려는 것이지만 허무한 얘기들이다.
안좌오름 계열로는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안좌악(安佐岳), 1653년 '탐라지'와 '제주읍지'에 안좌악(安坐岳), 17세기 말 '탐라도'에 안좌촌(安坐村), 1703년 '탐라순력도'에 안좌악(安坐岳), 18세기 중반의 '제주삼읍도총지도'에 안좌악촌(安坐岳村), 1872년 '제주삼읍전도'에 안좌악촌(安坐岳村)으로 기록했다. 1899년 '제주군읍지'에는 봉귀소악(鳳皈巢岳)으로도 기록했다.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 위치한 병곳오름.
나타났다 사라져간 수많은 지명 본디 뜻을 모르는 데서 오는 혼란
병곳오름 계열로는 17세기 말 탐라도에 병화악(屛花岳), 1703년 '탐라순력도'에 병화악(屛花岳), 18세기 중반의 '제주삼읍도총지도'에 병화악(屛花岳), 1872년 '제주삼읍전도'에 병화악(屛花岳)으로 기록했다. '탐라도'에는 안좌촌과 병화악, '탐라순력도'에는 안좌악과 병화악, '제주삼읍전도'에는 안좌악촌과 병화악이 같이 나온다. 지역에서는 병고악(兵庫岳), 병고악(幷高岳), 병화악(幷花岳), 봉귀악(鳳歸岳), 안좌봉구악(安坐鳳構岳), 안좌악(安坐岳)으로 채록된다.
초기 기록으로는 안좌악 계열의 이름이 우세하다. 그러던 것이 두 가지 지명을 같이 쓰기도 하는 시기를 거쳐 점차 병곳오름 계열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지도에 병곳오름으로 나오는 것처럼 이제는 안좌악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병곳오름으로 정착했다. 이렇게 이름이 바뀐 것은 특정한 사건이 개입했다기보다 두 지명을 같이 사용하던 것이 마을 이름 안좌를 중시하여 초기 기록은 안좌 계열이 우세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던 것이 안좌라는 마을이 사라지면서 점차 병곳오름 계열로 전환한 것이다.
안좌라는 이름에 대해 700여 년 전 인근에 설촌한 안좌라는 마을 이름에서 유래한다는 설명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선후가 바뀐 이야기다. 오름의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을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지 마을 이름이 생긴 후에 오름 이름을 붙이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안좌오름이라고 불렀던 건 사실일 수 있다. '안좌'란 구좌읍 송당리 안친오름(아진오름)을 비롯해 몇 군데서 볼 수 있다. 안친오름 지명에도 여기서 말하는 '안좌'와 매우 유사한 이름들이 있다. 본 기획 48회와 52회를 참고하실 수 있다. 여기서는 '앛'계열 지명으로 설명했다. 이 지명은 여러 갈래로 파생했는데 모두 '작은'의 뜻을 갖는다. '앛', '앚', '앗-' 등 '앛'계열의 말은 '아추'를 기본형으로 하는 말로서 '어리거나 작은'을 뜻한다. 퉁구스어권에선 '아치', 몽골어권에선 '아진'으로 전개된다. 안좌오름도 이런 말에서 기원하는 작은 오름이라는 뜻이다.
병곳오름 내 골짜기. 김찬수
골짜기가 있고 봉우리는 뾰족해 고대인들은 형태와 지형을 중시
병곳오름은 무슨 뜻인가? 아마 이 기획을 꾸준히 읽은 독자들은 이미 짐작할 것이다. 앞서 개오리오름도 고전에는 병악으로 나온다. 병악이란 '갈올'에서 기원하는 말이다. 골이 있는 오름이라는 뜻이었다. 병곳오름도 바로 이런 뜻에서 기원한 지명이다. 병곳오름에 골짜기가 있을까? 자체높이 113m에 불과한 오름에 이렇게 깊은 골짜기 있을 거라곤 상상하기 힘들다. 이 골짜기엔 깎아지른 절벽도 있고, 커다란 현무암 덩어리들로 바닥은 울퉁불퉁하다. 병곳오름의 '병'은 훈이 '갈'인 병(竝)에서 기원한 것이다. 개오리오름을 병악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지형특징을 중시한 작명이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그럼 '곳'은 어디서 왔을까? 이 말은 제주도 지명에서 비교적 드문 지명소의 하나다. 뾰족한 봉우리를 지시하는 후부요소로 쓴다. 이 후부요소가 절묘하게 결합한 지명이 또 있다. 서귀포시 보목동에 있는 제재기오름이다. 몇 가지 표기가 있지만 오래된 표기로는 '저즉악(貯卽岳)'이 있다. 여기서 '저'라는 말은 '깎아 지른'을 의미하는 '절(絶)'에서 'ㄹ'이 탈락한 형태다. 깎아지른 절벽으로 되어있음을 뜻한다. 다음에 나오는 '즉(卽)'이란 글자는 '곧 즉'이다. 훈가자로 쓴 것이다. '곧'이란 오늘날의 '곶'과 같다. 육상이나 바다로 뾰족하게 튀어나온 곳을 지시한다. 제재기오름이란 깎아지른 절벽으로 되어있으면서 뾰족하게 솟은 봉우리라는 뜻이다. 원래는 '절곶이'였던 것이 한자로 표기하면서 바뀌었다. 제재기오름의 지명 기원에 대해서는 추가로 자세히 다를 것이다.
병곳오름 역시 '병곳' 또는 '병곶'으로 끝난다. 여기에 '오름'이 덧붙은 것이다. 본래 '골곶이'였던 것이 한자로 표기하면서 바뀐 것이다. 제재기오름의 본디 이름 '절곶이'와 병곳오름의 본디 이름 '골곶이'는 '곶이'를 돌림자로 하는 오름들이다. 이렇게 '곶이'를 돌림자로 하는 지명은 이외로도 더 있다. 병곳오름이란 '골'을 나타내는 '병'과 '곶이'를 나타내는 '곳'의 결합 지명이다. '골짜기가 있는 뾰족하게 솟은 봉우리'라는 뜻이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