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해안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동네마다 원담을 볼 수 있다. 마을 청년과 어르신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모여서 만든 유산이다. 바닷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공간에 원형으로 돌담을 낮게 쌓아서 물고기를 잡기 위함이다. 밀물 때에 원담 안으로 들어온 숭어(숭에), 전갱이(각제기), 고등어(고등에), 정어리(징어리) 등이 썰물 때엔 원담에 갇히게 된다. 간혹 돌고래(수웨기)와 상어(상에)도 들어오지만, 가장 기쁘게 한 어종이 바로 멸치(멜)였다. 물때에 맞춰 이른 새벽에 원담에 갔던 한 어르신이 멸치 떼를 보고는 동네 올레길을 돌며 '멜 들었쑤다'하며, 외쳐준다. 너나없이 바가지, 양동이, 구덕, 비닐포대 등을 들고 서둘렀다. 잠든 아이들도 깨웠을 정도로 멸치는 귀한 선물이었다.
바닷가의 원담 못지않게 밭담도 잘 쌓아야 한다. 바람 잘날 없는 섬이기에, 바람이 심할 때는 밭흙 뿐만 아니라 곡물 씨앗마저 날아가 버린다. 아버지들이 원담을 돌아보듯이 강풍이 지나가면 밭담이나 올레담을 돌아보는 게 큰 일과였다. 태풍 때에는 바닷가 돌들이 육지로 올라올 정도여서, 밭담도 무사할 순 없었다. 무너진 정도가 지나치다 싶으면, 이웃 삼촌들이랑 함께 거들었다. 요즘처럼 중장비가 없던 시절이라, 쌓을 때도 보수할 때로 큰 걱정이었다. 잣성과 환해장성 그리고 방사탑과 불턱을 쌓을 수 있었던 것도 이웃들의 하나 된 힘이었다.
돌담을 쌓는 일은 함께 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일인가를 보여주는 유산인 동시에, 마을 공동체의 상징이다. 제주 사람들은 모두가 돌담 전문가이다. 기초를 다지는 것에서부터 돌담 틈새를 이용하거나 메꾸는 솜씨 그리고 돌담을 깨거나 다듬는 역할, 특히 쌓는 일은 힘과 요령이 중요하다. 서로의 기술을 전수해주는 과정 속에서 양보와 배려의 아름다움, 서두름과 게으름의 교훈 그리고 유비무환을 몸소 터득하게 됐다. 군대에 가서도 돌담을 쌓는 일은 죄다 제주 청년들이 담당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돌담이 무너져도 일으켜주지 않고, 원담에는 물고기와 오분자기(오분재기) 대신에 플라스틱이 쌓이고 있다. 멜이 들어와도 잡을 생각이 없고, 산담은 왜 쌓았는지 따진다.
한때 온통 까만 현무암으로 가득해서인지, 섬의 역사가 암울했다. 제주 사람들은 돌과 바람 때문에 속상한 일도 많지만, 돌과 바람 덕분에 공동체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또 다시 어두운 세상으로 되돌아 갈 순 없다. 모두가 아파하는 악담보다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덕담을 남겨야 한다. 담을 쌓는 것도 그렇고, 상대방에게 던진 말도 그렇다. 말하는 순간 농담인지 진담인지 판가름이 나며, 원담 위에 앉은 바다직박구리(엉생이)도 들었다. 밭담, 잣담, 원담, 산담, 올레담 못지않게 세상을 바꿀 덕담을 쌓는 일이 쉽지 않다. 정성을 다한 돌담이 무너지지 않듯, 진심을 갖고 토해낸 덕담이 상대방에게 그리고 사회에 큰 디딤돌로 자리 잡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김완병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