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대구는 보수의 도시다. 이 말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다. '막대기를 꽂아놔도 무조건 보수당을 찍는다'는 묻지마 보수의 도시로 알려진 대구는 실은 가장 진보적인 도시였다. 일제강점기부터 섬유산업을 비롯한 산업시설들이 들어섰고 노동자들이 모이면서 동양의 모스크바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인권과 계급의식이 높은 도시였다. 해방 후 미군정 치하에서 벌어진 대구항쟁은 대구폭동으로 알려진 민생 문제 기반의 항쟁이다. 그것은 미군정이 점령한 한반도 남단에서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고 양곡 배급 정책의 실패로 민생이 도탄에 빠지자 대구의 여성을 비롯한 시민들이 저항한 것이다.
1946년 10월 1일에 대구역 광장에서 시작한 항쟁은 순식간에 달성군을 비롯한 경상도로 이어졌고, 이내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전라도, 경기도, 황해도 등 전국으로 확산했다. 이는 미국의 군인이 한반도 남단의 통수권자로서 친일파를 재등용하고 그 결과 일제 강점기의 기득권자들이 그대로 민중을 수탈하는 악순환을 낳았기 때문이다. 흔히들 대구폭동이라고 알고 있던 이 사건이 대구항쟁으로 정명할 수 있었던 것은 진실화해위원회와 대구시의회가 대구항쟁 유족들과 시민들의 문제 제기를 경청한 결과이다. 그것은 민생 문제로 들고일어난 부모형제들이 폭도로 몰리고, 6·25 전후에 보도연맹 사건으로 집단학살당한 무고한 인명들을 잊지 않겠다는 기억투쟁의 결과이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렇게 규정했다. 대구항쟁은 "해방 직후 미군정이 친일 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 공출을 강압적으로 시행하는 것 등에 대해 불만을 갖고 경찰과 행정당국에 맞서 발생한 사건"이다. 대구시는 이를 근거로 2016년, '대구광역시 10월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 등에 관한 조례안'을 만들어 대구항쟁과 한국전쟁 전후 희생자 위령사업을 시작했다. 대구폭동이 대구항쟁으로 정명됐다는 점. 이 얼마나 엄중한 역사적 사건인가! 4·3항쟁이 그냥 '제주4·3'으로, 광주5·18항쟁이 '광주민주화운동'에 머물러 있다는 점을 각성하게 하는 일이다.
지난달 제주청년예술가들의 '한반도평화예술투어'에 대구와 광주의 예술가들이 합세해 대구항쟁 답사를 다녀왔다. 대구항쟁의 주요 장소들을 찾아다니고, 유족들을 만나 위령비에 추모하고, 가창의 코발트광산 집단학살터를 찾아 4·3항쟁 전후에 벌어진 거대한 역사를 체감하고 왔다. 오는 9월 30일에는 대구항쟁 78주년 맞이해 대구의 시민, 예술가들이 '대구10·1전야제'를 준비한다고 한다. 전국의 예술가들이 모여 해방 이후 항쟁사의 첫머리에 존재하는 대구항쟁의 뜻을 기리고 널리 공유하는 축제의 장을 연다. 제주, 여순, 6·25, 4·19, 부마, 5·18, 6·10 그리고 촛불로 이어지는 해방 이후 학살과 항쟁 역사의 퍼즐은 대구 10·1로부터 출발한다. '대구10·1전야제', 착수가 곧 성공이라, 맥진할 따름인져! <김준기 광주시립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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