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어쩌다 마주친 그대

[영화觀] 어쩌다 마주친 그대
  • 입력 : 2025. 01.20(월) 03:30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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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메모리'.

[한라일보] 가끔은 스스로가 한겨울의 나무처럼 느껴질 때가 있을 것이다. 버석하게 마른 몸이 앙상하게 느껴지고 새싹이 돋아날 봄은 어쩐지 오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때는 예고 없이 찾아와서 기한 없이 머무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뿌리를 내린 상태이다.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는 채로 버티는 이에게 그 한기는 실체 없이 매섭고 차갑다. 사람의 온도는 언제 변할까. 뜨거운 마음과 차가운 몸, 혹은 뜨거운 몸과 차가운 마음 사이에서 우리는 어떻게 적정 온도를 찾아내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는 더 없이 혹독할 계절인 겨울에 그 질문을 품고 누군가를 찾아 나선 영화가 도착했다. 미셸 프랑코 감독의 영화 [메모리]다.



퍼스널 컬러를 찾는 시대다. 나에게 잘 어울리는 색깔을 통해 나를 더 돋보이게 만드는 보물 찾기에 흥미를 느끼는 이들이 많다. 퍼스널 컬러를 찾는 것은 성형이나 메이크업 같은 변신술 보다는 이제껏 몰랐던 나의 어떤 부분들을 찾아내는 발견의 즐거움에 가깝다. 나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구현하는데 있어서 인간은 꽤 꾸준한 노력을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천생연분'이라는 말이 있었다. '하늘이 정하여 준 연분'이라는 이 말은 '나에게 꼭 맞는 짝을 발견한 이상적 매칭의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나에게 잘 맞는 정도가 아니라 꼭 맞는 것, 그래서 나를 돋보이게 만들고 안전함과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것. 세상에 단 하나 뿐인 나의 것을 찾는 일은 어쩌면 환상을 현실로 데려오고자 하는 지난한 출항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깊은 타인의 바다 속에, 저 먼 나의 끝에는 과연 있을까, 내가 그토록 발견하고 싶어하는 것이.



[메모리]는 기억을 잃어가는 남자와 기억을 잊지 못하는 여자의 이야기다. 영화는 차가운 겨울의 메마른 기운으로 시작한다. 어떤 치장 없이 인물들이 처한 지금의 상태를 건조하게 따라가는 영화의 시선은 인물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 쉬이 누설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의 지연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남자 사울은 기억을 잃어 가고 있다. 그는 과거의 어떤 것들과 매일 이별하며 사는 이다. 여자 실비아는 과거의 어떤 기억을 결코 잊지 못하는 이다. 그 기억은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녀의 현재와 미래까지를 침식시킬 정도다. 우연히 실비아를 마주친 사울은 그녀를 따라 그녀의 집 앞에까지 가서 밤을 지새운다. 그가 기다리는 것이 그녀인지는 불분명하다. 사울과 실비아는 외로운 이들이다. 어쩌면 그 외로움을 느끼는 것 조차가 사치로 느껴질 정도로 고립된 이들로도 보인다. 삶의 틈에서 어떤 것이 점점 빠져 나가는 사울과 삶의 틈으로 무언가가 자꾸 파고 들어오는 실비아, 두 사람 사이에는 견고한 벽이 있다. 영화의 중반까지 나는 이 벽 앞에서 과연 두 사람이 어떤 소통을 할 수 있을지 기대하지 못했다. 그 단단한 벽의 벌어진 틈 사이에서 두 사람이 나눌 수 있는 것들이 과연 있기나 할까 하고 지레 포기했던 내게 영화는 후반부 놀라운 재건의 과정을 보여준다.



스스로의 고독 안으로 침잠한 인간은 때로는 수렁에 가까운 고립의 상태에 처할 수 있다. 믿을 수 있는 것이 오로지 나 뿐이라고 느끼면서 스스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이는 위험 신호를 감지하고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세상으로부터 숨어 있는 상태일 것이다. 내 안의 모든 열원들을 다 꺼내어 아껴 쓰더라도 몸도 마음도 어느 틈에 차갑게 식어갈 것이고 희망을 발화하는 것이 거짓을 공표하는 것이라고 이른 포기의 결정을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메모리]는 그 상태 직전의 인물들에게 서로를 데려다 놓는 영화이다. 이 버석한 인물들 앞에 그들이 느낄 수 있었을, 아직 놓치지 않은 순도 높은 사랑의 감정을 영화는 마법처럼 선사한다. 그런데 이 마법을 대하는 영화의 태도가 독특한 결을 만들어 낸다. 로맨스 장르 영화의 클리셰와는 다르게 [메모리]속 마법의 순간은 소박하고 담담하다. 어떤 치장을 위한 혹은 포장을 위한 법석 없이 그저 인물들의 예열을 찬찬히 감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울과 실비아가 느끼는 것을 관객들 또한 스며들 듯 감지할 수 있게 된다. [메모리]는 절망의 시간을 지나가면서도 동시에 희망의 신호를 감지할 수 있음을 그렇게 알려준다. '그토록 찾아 헤맨 나의 이상형을 만나는 이야기'가 아닌 '이렇게 헤매는 내 앞을 지나치지 못하고 멈춰선 타인을 마주하는 일'이 어쩌면 사랑 영화의 정수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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