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제주의 오름은 저마다 모양이 다르다. 정상은 한라산보다 한참 낮아도, 그 봉우리에 올라서야만 보이는 풍경이 있다. 지난 1월 제주지방조달청장으로 부임한 후 도내 기업의 현장을 찾아다닐 때마다 나는 이 풍경을 자주 떠올렸다.
지난 몇 달간 살펴본 도내 기업들은 저마다 자기 자리에서 깊이 있는 일을 하고 있었다. 큰 시장의 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그 자리에 서야만 보이는 일들이었다. 잃어버린 반려동물을 가족 곁으로 돌려보내는 유전자 식별 솔루션, 태양광 발전 설비의 미세한 이상을 사고로 번지기 전에 짚어내는 시스템, 평범한 시민도 위급한 순간 정확한 자리에 압박을 가할 수 있게 돕는 심폐소생술 도우미…. 그 봉우리에 오르지 않았다면 결코 보이지 않았을 풍경들이다.
이런 기업들이 더 멀리 뻗어나갈 수 있도록 공공조달의 틀이 바뀌고 있다. 조달청은 혁신 기술을 가진 중소기업이 공공구매를 발판 삼아 성장하도록 혁신조달을 확대한다. 인공지능, 로봇, 바이오 등 신산업 분야 제품을 적극 발굴해 정부의 공공구매가 초기 시장을 여는 마중물이 된다. 동시에 지방정부의 조달 자율성을 단계적으로 확대해 올해 경기도와 전북특별자치도에서 전기전자제품군을 대상으로 조달청 단가계약 물품을 의무구매하지 않고 직접 구매할 수 있도록 했다. 성과분석을 거쳐 2027년 지방정부 전체로 확대할 계획이다. 지역의 사정과 목소리가 정책의 중심에 더 가까이 닿는 흐름이다.
이렇게 자율의 폭이 넓어지는 만큼 책임의 무게도 함께 커진다. 자율의 파도는 높이되 공정의 둑은 더 단단히 쌓아야,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조달 생태계가 유지된다. 조달청은 자체 조달 계약까지 모니터링해 규정 위반이나 부당한 입찰 조건에 대해 엄격히 시정·개선을 권고하고, 비리 적발 시 일정기간 동안 자율구매를 중단시키는 '원스트라이크 아웃제'를 적용해 감독의 실효성을 높일 방침이다. 또한 중소·여성·장애인기업 등 약자 기업의 조달 실적이 유지되도록 상시 점검하고 그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해, 자율화가 공익의 후퇴로 이어지지 않게 관리할 것이다. 자율과 책임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한 쌍의 능선이다.
제주지방조달청은 그 능선 위에서 도내 기업의 곁을 지켜왔다. 지난해 6968억원 규모의 조달사업을 차질 없이 집행했고, '공공조달길잡이' 제도를 통해 45곳의 도내 중소기업과 일대일로 마주 앉아 첫걸음을 함께 떼었다. 올해 들어서도 도내 기업의 혁신제품·우수제품 지정이 잇따랐고, 지난 3월에는 제주특별자치도 사회적경제지원센터와 함께 사회연대경제기업을 초청해 조달제도를 자세히 풀어주는 자리도 마련했다. 어느 한 봉우리에서 다음 봉우리로 건너가는 디딤돌을 놓는 일이었다.
그 발걸음이 향할 곳은 지역이다. 자율의 시대는 지역의 시대다. 도내 기업이 자기 자리에서 보이는 풍경을 더 멀리, 더 오래 그려갈 수 있도록 기업의 어려움을 가까이에서 마주하고, 조달청이 할 수 있는 지원을 적극적으로 찾아가겠다. <김수열 제주지방조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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