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국의 4·3 유적지를 찾아서-20. 와흘리 고평동과 수기동]단 하루의 토벌작전, 마을은 사라졌네

[오승국의 4·3 유적지를 찾아서-20. 와흘리 고평동과 수기동]단 하루의 토벌작전, 마을은 사라졌네
  • 입력 : 2007. 08.31(금) 00:00
  • 강시영 기자 sykang@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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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사람 사는 향기가 정겹게 피어난다. 다시 마을이 들어서나 보다.

마을을 관통하는 남조로의 고평동 마을 초입에는 꽤 알려진 식당들이 두서너 곳 성업 중이다. 아마 외딴 중산간을 지나는 객들이나 인근에서 밭일, 목축일 등을 하는 사람들이 자주 들르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 보면 역사의 생채기가 거꾸로 가듯, 원래 집터주인의 피붙이는 아무도 없고 육지부에서 온 주민 등 거의가 외지인들이다. 4·3이후 마을의 주체가 완전히 뒤바뀐 것을 알았을 때, 씁쓸함과 쓸쓸함이 온 몸을 적셨다.



궤가 많아 궤뜨르, 물 터져 물터진골



고평동과 수기동은 15년 전 만하더라도 집 몇채와 아무도 없는 옛 올래길과 대나무만 서걱이는 빈 들이었다. 이 마을은 1948년 11월 13일 9연대 군인들에 의해 주민 대다수가 학살 당하고, 온 마을이 방화 소각됨으로써 오랜 세월동안 폐허의 마을로 남아 있었다.

그 사이 마을의 땅들은 다른 마을 유지들에게 넘어가고 말았으며, 팔았다 하더라도 먹고 살기 힘든 세월이었으므로 제 값을 받지 못한채 거의 타인의 것이 되고 말았다.

'궤뜨르'와 '물터진골'은 제주시 조천읍의 중산간 마을이다. 번영로와 남조로가 교차하는 경찰검문소 사거리에서 북쪽으로 5백 미터쯤 내려가면 궤뜨르 마을이 보이고, 거기서 서쪽 5백미터 쯤에 물터진골 마을이 위치해 있다.

궤뜨르와 물터진골은 각각 고평동(古坪洞)과 수기동(水基洞)이라는 한자식 이름으로 개명되었으며, 행정구역상으로는 제주시 조천읍 와흘리에 속한다.

4·3 당시 두 마을은 조천면 와흘2구를 이루는 당당한 법정리이기도 했다.



학살과 방화



4·3 초기 와흘2구는 워낙 깊은 중산간 마을이어서 비교적 무장대의 입김이 강한 소위 민주부락이었다. 4월 3일 당일에도 마을 주변의 바늘오름과 새미오름에 봉화가 오르는 걸 주민들은 보았다고 한다.

5월 10일 제헌의원 선거시에는 선거관리위원들이 사표를 내고 잠적해버렸으며, 궤뜨르와 물터진골 주민들 또한 밭에서 일을 하거나 바늘오름과 새미오름 근처에 잠시 피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와흘2구 마을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중산간 마을이 공통된 현상이었다.

조용했던 궤뜨르와 물터진골이 죽음의 아수라장으로 되던 날은 1948년 11월 13일이었다.

이날 송당에 주둔했던 9연대(연대장 중령 송효찬) 2대대(대대장 대위 김창봉) 주력부대는 새벽에 교래리를 기습하여 마을을 방화하고 주민들을 집단학살한 다음, 날이 밝을 무렵 와흘 2구인 궤뜨르와 물터진골로 이동하여 마을에 남아있는 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모든 집을 불 태웠다.

당시 와흘2구는 약 40여 호에 2백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본 마을인 와흘1구는 이틀 전 마을 방화에도 불구하고 큰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와흘2구는 이날 50여명의 목숨이 희생되었다. 대다수가 부녀자나 노인들, 어린 아이들이 이 날 목숨을 잃었다. 젊은이들은 이미 근처 야산으로 피신해 있으면서 더러는 이 광경을 목격했다.

"물터진골이 불타는 걸 근처에 숨어서 지켜 보았는데, 총소리가 났지만 설마 사람 죽이는 걸로는 생각도 안했지. 서너 시간 후에 현장에 가보니까 처참한 모습이었어. 마을 옆에 숨어 있던 아주망 하나, 하르방 하나 살아 있고, 나머지는 전부 죽어 있었으니까. 어린 아이를 안은 아주망은 창자가 터져 불룩불룩 거리면서 물을 달라고 겨우겨우 말을 하는데, 총을 맞은 사람에게 물을 줄 수도 없고, 무슨 약이 있어서 치료를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그냥 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도 이미 죽어 있었지. 다른 담벼락 옆에는 할머니하고 애기들이 엎어져 죽어 있었는데, 그 할머니는 앞도 못보는 사람이었지. 군인들은 늙은이고 아이고 가리지 않고 그냥 보이는 대로 총으로 쏘아 죽여버린거야." 당시 상황을 지켜본 강인조(80) 할아버지의 증언이다.

이 날 또 아랫 마을인 신촌리에서 피난 온 여자들 9명가량이 물터진골과 궤뜨르 가운데에 있었던 몰방앗간에 숨어있다가 죽임을 당했다.



사라진 삶의 공동체



공식적인 소개명령도 없이 벌어진 9연대의 무도한 학살극에 와흘2구 마을의 삶의 공동체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당시 궤뜨르에는 23가호가 살고 있었는데 그 날 희생자가 없는 집이 별로 없었습니다. 4·3 기간 동안 18가구는 가족이 전멸했고, 3가구는 가족 중 일부가 죽었습니다. 2가구를 제외하곤 모두 피해를 당한 것입니다. 우리 집의 경우, 그 날만 동생 강태순(13)과 호적에 올리지 않은 동생 강태범(4), 그리고 이름 조차 짓지 않은 두살 난 동생이 죽었습니다." 생전 강태원 할아버지의 말이다.

이미 1948년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사령관 김상겸 대령, 후임에 송요찬 중령)가 새로 설치되어 기존의 제9연대에 부산의 제5연대 1개 대대, 대구의 제6연대 1개 대대가 증파 보강되었다. 여기에 다시 해군함정(해군소령 최용남 부대)과 제주경찰대(홍순봉 제주경찰청장)를 통합 지휘하는 권한까지 부여되면서 중산간 마을에 대한 본격적인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날의 학살은 11월 17일에 내려진 계엄령 선포 사흘 전이었다.

살아남은 와흘2구 주민들은 11월 21일, 마을 방화와 함께 소개령이 내려지자 조천과 신촌리로 피난갈 수 밖에 없었다. 학교나 창고 등에 수용된 이들은 시시각각 찾아드는 군경의 사상검열과 축성작업에 시달리다가 일부는 자복사건에 걸려들어 박성내에서 총살당하기도 했다.

그 후 궤뜨르와 물터진골의 와흘2구 주민들은 대흘국민학교에 성을 쌓아 살다가, 일부는 1957년에 마을 재건과 함께 올라왔다가 대부분이 다시 내려가 신촌, 대흘, 조천, 제주시 등지에 흩어져 살고있다.

현재 궤뜨르에는 김동규(69) 씨가 4·3의 상처를 안고 당시 마을 주민으로는 유일하게 동네를 지키고 있다. 물터진골의 중심에는 우석목장이 들어서 있어서, 4·3 이후 주민들의 땅이 어떻게 넘어 갔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 터에 '잃어버린 마을' 비가 서있다.

고평동과 수기동에는 지금도 4·3의 아픔을 간직한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궷드르 당과, 버들못, 그리고 실곶궤와 마을궤, 올래와 밭담,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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