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강정은 교육감이 횡간분교장을 방문해 학생들과 기념촬영했다. /사진=제주교육박물관 제공
1951년 학교 설립 기성회 조직… 마을서 부지매입· 공유림 기증
장학선 운항 멈췄지만 추자항-추포도-횡간도 잇는 행정선 가동
회색빛 돌담길이 납작납작한 지붕을 따라 길게 이어졌다. 거무튀튀한 제주섬 돌담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제주도의 다도해'로 불리는 추자도. 4개의 유인도와 38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진 섬이다. 그중 한곳이 횡간도(橫干島)다. 가로로 길게 누운 형상을 한 이 섬에 오래전 아이들이 뛰놀던 학교가 있었다.
▶91년 폐교후 장학선 북군청에 양여
9월 현재 섬에 실제 거주하는 이들은 7가구에 9명. 김영태 횡간도 자가발전소장 부부가 나이 40대로 가장 젊고 50대 1명, 60~70대 각 2명씩 섬에 살고 있다. 고령에 '물질'을 하고 해초를 캐서 생계를 꾸리는 등 도시민에 비해 수입은 적지만 섬에서는 큰 어려움이 없다.
횡간도 주민들의 숙원사업중 하나는 학교 설립이었다. 학생들이 배편을 이용해 추자도까지 왕래해야 하는 불편이 컸기 때문이다. 1984년 횡간분교에서 작성한 학교 연혁을 보면 추자국민학교 횡간분교장 설립기성회가 조직된 해는 1951년 7월 1일. 한국전쟁 시기였지만 섬은 묵묵히 배움의 공간을 빚어냈다. 주민들은 1953년 마을 공유림(500평) 일부를 학교림으로 기증하는 등 분교장 운영에 힘을 보탰다. 추자국민학교가 펴낸 '추자학구향토지'(1987)에는 주민들이 자력으로 학교부지 60평을 매입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횡간도
기성회는 8월 20일 가교사 목조건물(20평)을 지었고 열흘뒤인 30일 4년제 1학급으로 횡간분교장 설립 인가를 받는다. 개교는 9월 9일 이루어졌다. 1954년 6학년제 1학급 인가를 받고 1956년에는 2학급으로 늘었다. 1955년에는 분교장에서 제1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횡간분교장이 운영되는 동안 이른바 '장학선'이 있었다. 교사 공무와 주민들의 바깥 나들이에 쓰였다. '추자도지'(1999)에는 북제주군교육청이 1967년부터 '한영호'로 불리는 7톤 규모의 장학선을 운영했다고 썼다. 1972년부터는 새로 건조된 19톤 크기의 '청운호'가 '한영호'를 대신했다. 목선이던 '청운호'는 1982년 강선으로 탈바꿈했지만 1991년 횡간분교장이 폐교하면서 이 배는 북제주군청으로 넘겨졌다.
▲횡간분교장에 놓인 '배움의 옛 터'표지석. /사진=진선희기자
▶문화·인성교육센터 확대는 구호뿐
장학선은 지금 행정선 '추자호'로 얼굴과 이름을 바꾸고 추자항-추포도-횡간도를 1주일에 네차례 오간다. 추포도는 횡간도와 이웃한 섬으로 이곳에서는 1969년부터 1983년까지 '초미니 학교'인 추포도 교습소가 운영됐다. 횡간도와 추포도에 사는 주민들은 '추자호'에 의지해 생필품을 실어나르고 해산물을 내다판다. 뭍으로 향하는 주요 수단도 바로 '추자호'다. 인건비를 제외한 '추자호'의 연간 운영비는 7000만원이 넘는다. 장학선의 한 해 운영비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추자국민학교의 마지막 장학선 선장이던 원장희씨(69·추자면 대서리)는 "횡간도에 전기가 안들어오고 전화가 없던 시절엔 장학선이 싣고 오는 소식을 들으려 섬 주민들이 모두 선착장에 나와있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횡간도 비탈길 너머로 보이는 추자도 주변 섬.
▲장학선 '청운호'의 뒤를 이어 운항중인 행정선 '추자호'.
최근 집계된 추자도 인구는 398세대 1700여명. 대부분 상·하추자에 몰려산다. 추자항에서 뱃길로 20분쯤 걸리는 추포도는 거주자가 5명이 채 안되고, 30분 소요되는 횡간도는 10명에 못미친다. 아이들 웃음소리 사라진 그 섬엔 일찌감치 학교가 문을 닫았다.
제1대 최정숙 교육감(1964년 2월~1968년 2월) 당시 그는 풍금 보급운동을 진행하면서 장학선을 타고 횡간분교장까지 직접 악기를 실어날랐다. 외딴 섬의 작은 학교지만 '차별'은 없었다. 하지만 학교가 사라진 지금 상황이 바뀐 모양새다. 도교육청은 폐교를 활용한 문화·인성교육센터를 확대하고 마을 공동체의 기능을 회복하는 관리방안을 모색하고 있다지만 횡간도엔 오래도록 그 손길이 미치지 않고 있다.
폐가로 변한 옛 배움터…잡풀로 뒤덮이고 곳곳 파손
문짝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고 군데군데 이가 빠진 마룻바닥은 금세 무너져내릴 듯 했다. 오래도록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학교는 폐가보다 더한 모습이었다. 전쟁이 지나간 자리가 이럴까.
추자국민학교 횡간분교장의 온전한 모습은 몇 장의 사진으로 겨우 확인됐다. 북제주교육청이 발간한 '북제주교육50년사'(2004)에서 교사 전경, 주변 섬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학교 뒷편의 운동장, 10여명의 횡간분교장 아이들 얼굴을 만났다.
▲폐허처럼 변한 옛 횡간분교장.
김영태 횡간도 자가발전소장의 안내로 분교장을 찾았을 때 간신히 눈에 띈 것은 '배움의 옛 터'가 새겨진 빗돌이었다. 그 나머지는 처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잡풀이 웃자라 건물을 뒤덮은 탓에 옛 학교의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어딘가에 직원 숙직실, 간이 창고, 미끄럼틀과 그네가 있었을 테지만 1991년 문을 닫은 이후 사람들의 기억속에 차츰 잊혀진 횡간분교장은 그렇게 방문객을 맞았다. 40년간 섬의 아이들을 키워냈던 학교는 이제 뼈대만 남은 채 가쁜 숨을 쉬고 있다.
추자면 대서리 산 69번지. 학교는 섬의 꼭대기에 들어섰다. 횡간도에 도착해 사람 두어명이 겨우 지나다닐 법한 좁고 가파른 길을 300m쯤 오르면 횡간분교가 나타난다. 김영태 소장이 재학할때는 60명의 학생이 다니던 학교였다. "마을 주민들에게라도 폐교 관리를 맡기면 좋을텐데…." 김 소장은 흉물이 되어버린 횡간분교장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김영태 횡간도 자가발전소장 "폐교 활용에 무관심…화재라도 나면 큰일"
"5~6년전부터 전기와 수도가 들어오면서 생활에 불편이 없어졌다. 살기 좋아졌다. 하지만 학교 문제는 예전 그대로다."
김영태(46·사진) 횡간도 자가발전소장은 횡간분교 이야기를 꺼내자 말이 빨라졌다. 4대째 횡간도에 살고 있다는 김 소장은 횡간분교 4학년때 섬을 떠났다. 30년동안 다른 지역에 발을 붙이고 살다가 추자도를 거쳐 2001년 횡간도로 귀향했다. 섬의 주거환경이 한해 두해 나아졌지만 문 닫은 횡간분교의 얼굴은 좀체 바뀌지 않았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학교(추자초등학교)에서 관리비를 받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1년에 한번 잠깐 왔다갈 뿐이다. 10년전이나 지금이나 학교가 방치되어 있는 모습은 똑같은 것 같다. 이래선 안된다."
그는 이대로라면 건물을 철거하는게 낫다고 했다. 섬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꿈을 키워줬던 학교가 외부 사람들에게 섬의 흉물로 비쳐지는 게 싫다는 것이다. 거기다 방문객들의 부주의로 화재라도 나면 섬 주민 전체가 삶의 터전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낚시꾼 등 한햇동안 횡간도를 찾는 관광객이 2000~3000명쯤 된다. 보길도 등 주변 섬이 한 눈에 들어오는 횡간분교터를 제대로 가꾸면 횡간도의 새로운 명소가 될 수 있다. 교육청이나 자치단체에서 횡간분교 활용 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