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훈의 제주마을 탐방] (58) 제주시 애월읍 수산리

[양기훈의 제주마을 탐방] (58) 제주시 애월읍 수산리
지혜로운 사람들이 자연과 더불어 사는 그림같은 마을
  • 입력 : 2015. 09.22(화) 00:00
  • 표성준 기자 sjpyo@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마을회관 옥상에서 수산봉 방향으로 바라본 마을전경(위)과 당동네와 수산봉 주변 풍경(아래).

고려시대 삼별초 기록 감안할 때 700여년 전 설촌
천연기념물 곰솔, 기품 담은 마을 수호목으로 보존
자유당시절 수산저수지 조성되며 70세대 수몰 아픔
지역 주민 "주변 경관 활용 도농복합 휴양마을 추진"



마을위치도

산수화를 뒤집어 부르면 말과 뜻 그대로 수산(水山)이다. 그림 같은 마을. 수산봉과 저수지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사람들이 자연과 하나 되어 살아간다. 인자요산 지자요수(仁者樂山 知者樂水). 어진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이 모두 산과 물을 닮았다고 하는 것은 수산리 사람들을 두고 이르는 말일 것이다. '물메'라고 부르다가 한자 표기로 마을 이름이 바뀌었다. 지금도 물메라는 우리말 이름이 더 정감있다고 하며 주민들이 즐겨 부른다. 주변에 5개의 마을이 둘러싼 오지랖 넓은 마을이기도 하다. 동북쪽에 하귀2리, 동쪽에 상귀리, 남쪽에 장전리, 서쪽에 용흥리, 서북쪽에 구엄리가 있다. 수산리는 예원동, 상동, 당동, 하동 4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구 1400명에 육박하는 마을이다.

여러 사료들을 종합하여 보면 설촌은 700여 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 삼별초가 제주에 들어와 항파두리성을 쌓았을 때, 주변 마을에서 사람들을 동원하여 부역을 시켰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주변마을의 실체가 그렇다는 의미. 기록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수산리가 얼마나 유서 깊은 마을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역사가 있다. 수산 곰솔이다. 천연기념물 제441호, 높이 12.5m, 둘레 5.8m다. 400여 년 전 수산리 어느 뜰 안에 심었으나 집이 없어진 뒤에 강씨 선조가 관리하였다고 전한다. 수산리 주민들은 마을을 지키는 수호목이라 믿고 잘 보호해왔다. 눈이 내려 덮이면 형상이 백곰과 같다고 하여 곰솔이라 불렀다고 한다. 장마철에 저수지 수위가 올라가면 늘어진 가지가 물에 닿아서 수산봉에 사는 큰 곰이 물을 마시러 내려온 모습이다. 옹골찬 기품이야말로 수산리에서 자란 사람들의 어린 시절 호연지기를 연마하는 역할모델이 되었을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 신비감마저 풍기는 소나무가 세상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뒤집어 생각하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50년대말 원뱅디 70세대가 강제이주당해 수몰의 한을 가진 수산저수지.

물메오름 아래 방대한 수량을 자랑하는 수산저수지는 쓰라린 수산리 역사의 한 자락이 잠겨있는 곳이다. 원래 이곳에는 70세대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 정겹게 살아가는 마을이 있었다. 1957년 3월 중앙정부의 탁상행정은 식량증산을 목적으로 한 농업용 저수지를 만들기로 결정한다. 속칭 답다니내(川)를 막고 저수지 공사를 시작하여 1960년 12월에 준공하였다. 원뱅디에 거주하던 마을 사람들을 비롯하여 수산리 주민들이 격렬한 반대에도 당시 자유당정부는 공권력이 동원 할 수 있는 모든 야비한 수단을 가지고 해당 주민들을 겁박하여 반강제로 몰수했다. 항거하는 농민들을 협박하기 위하여 4·3 당시의 행적을 물으면서 '국가 시책에 반대하면 빨갱이 아니냐?'고 윽박 지를 땐 그 공포감에 도장을 찍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수산저수지에서 수면에 비친 수산봉을 바라보노라면 피눈물을 흘리면서 절규하는 할망들과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수산봉에서 한라산 방향으로 바라본 풍경.

섬 제주의 유일한 수몰마을의 역사를 법적으로, 행정적으로 문제없이 건설된 저수지라고 하고 있으니. 공권력을 동원하여 반강제로 만들어낸 저수지라면서 농업 생산성을 증대시키는 용도로 써보지도 못하고 방치. 지금은 어떠한가. 농어촌공사가 관리를 하고 있는 공공자산이지만 농업용수로 사용되는 물은 없다시피 하다. 애꿎은 뱅디왓 주민들의 삶의 터전만 파괴시킨 자유당정부 시절 몰상식한 행정의 전시 사례인 것이다. 시대가 흘러 마을에서 찾아와 정적인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려 해도 법적으로 국가소유인 수산저수지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마을 안에 있는 경관 자원도 주민들이 활용할 수 없는 현실을 언제까지 수수방관 할 것인지?. 특별자치도가 되면서 다양한 자율성이 논의되던 때, 수산리로 귀속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걸었지만 행정당국의 관심 밖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주민들이 이구동성으로 소망하는 것은 수산저수지가 주민들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역사성에 입각하여 그렇다. 과도적으로 유연하게 관광자원화의 길을 열 수 있는 접점이라도 찾아가면서. 아픔만큼의 희망이 움트는 마을이다.

강남석(61)이장이 밝히는 발전구상은 구체적이다. "수산봉을 비롯한 풍부한 경관적 가치와 마을 주민들의 역동적인 경관개선 의지가 농림식품부로부터 인정을 받아 '창의적 경관개선 사업'이 실질적인 설계단계에 도달해있다. 올해 내로 순차적인 공사가 이뤄져서 완료된다면 제주시 서부권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마을이 될 것입니다." 양진혁(40) 직전 청년회장은 "수산저수지에 번지점프대를 설치해서 수산마을기업이 수익사업을 하거나 낚시터로 활용할 수 있도록 농어촌공사가 민원해결 의지를 가져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졌다. 김상순(67) 경관계선사업 추진위원장은 "경관개선사업 이후에 수산리의 인지도가 높아지면 밀려들 탐방객들을 수용할 수 있는 후속 대책을 지금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프로그램 중심의 도농복합형 힐링관광 상품을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여 더 큰 부가가치를 마을 자산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에 행정 지원이 있다면 주민들의 자발성을 에너지원으로 하여 큰 성과를 이룩할 것입니다." 문태호(76) 노인회장의 어머님이 101세다. "나보다 더 기억력이 좋으시고, 할 일들을 더 많이 하시니 제가 106세가 되는 30년 뒤 131세까지 사실 것이 확실합니다.

허리 굽혀 물을 마시는 수령 400년 된 곰솔(천연기념물 제441호).

제 꿈은 100세 넘은 아들 상주가 되는 것이외다. 그래서 수산리 채소들로만으로 식사를 하지요. 건강해야 꿈을 이루니까." 물 좋고 산 좋은 곳에서 사람이 장수하는 것. 30년 뒤, 수산리 모습을 대부분의 마을 주민들은 이렇게 그리고 있었다. 수산저수지 관리 주체가 수산리로 바뀌어서 가장 아름다운 공원이 있는 도농복합 휴양마을이 되어있을 것이라는 것. 수산리의 꿈이 날개를 펼치기 시작했다.

<공공미술가> <인터뷰 음성파일은 ihalla.com에서 청취 가능>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9952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