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수의 스피시즈 한라산엔시스 탐사(46)] 제2부 알타이의 한라산-⑥ 건조에 살아남은 곰팡이밑동나무

[김찬수의 스피시즈 한라산엔시스 탐사(46)] 제2부 알타이의 한라산-⑥ 건조에 살아남은 곰팡이밑동나무
더위·건조 견디며 세츠세그산에서 자라는 식물 군락
  • 입력 : 2018. 02.11(일) 20:00
  • 조흥준 기자 chj@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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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설로 덮여 있는 알타이산맥의 세츠세그산. 사진=국립산림과학원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 서연옥·송관필·김진·김찬수

모래·자갈·흙·토양 섞인 사막스텝
여러 종류 식물 군락이 넓게 형성돼

김찬수 박사

끝없는 사막이다. 어젯밤 야영했던 곳은 알타이에서 50 ㎞ 북쪽, 우리는 지금 그곳에서도 약 150㎞을 더 진행하고 하고 있다. 우리가 가는 이 고속도로 같이 잘 포장된 도로는 알타이에서 몽골 서북부의 중심이라 할 만한 도시 호브드로 가는 길이다.

아침에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였다간 사라지고 사라졌다간 다시 보이는 설산이 있다. 이 산은 알타이 시에서 좀 지나면 보이기 시작하는데 150㎞쯤 왔을 때부터는 그 모습이 뚜렷해졌다. 알타이 산맥 중에서 웅장하게 솟은 봉우리, 꼭대기 부분은 완전히 만년설로 덮여 있다. 이 뜨거운 7월의 사막 한가운데 이런 만년설을 보게 되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이 산은 세츠세그산(Tsetseg Uul)이다. 지난해 알락 하이르한산 탐사 당시 정상에서 바라봤던 웅장하게 솟은 눈 덮인 산, 바로 그 산이다. 본 란의 첫 회에서 사진을 제시했던 기억이 새롭다. 이 산의 정상은 해발 4090m이다. 우리는 당시 저 산을 다시는 볼 수 없는 머나먼 세상 밖의 그 어느 곳으로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다시 보게 되다니 정말 감격스러운 장면이다.

곰팡이밑동나무 군락

곰팡이밑동나무 잎.

불간솜(Bulgan sum)을 지나고 있다. 작지만 아름다운 마을이다. 이곳까지 오면서 몽골 서부의 사막, 알타이산맥, 그리고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사막은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 보듯이 움직이는 모래로 된 곳은 아니다. 자갈과 모래, 간간이 흙과 같은 토양도 보이는 사막스텝에 가까웠다. 나래새 군락, 짧은잎뿌리나무와 붉은모래나무 군락, 부추 군락을 볼 수 있었다. 1부에서 다룬 내용이긴 하지만 칼륨나무 군락도 여러 곳에서 매우 넓게 형성돼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러 종류의 식물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멀리 세츠세그산이 보인다. 우리는 그 곳까지 가 볼 수 없는 아쉬움이 진한 만큼이나 가능한 한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는 것이 중요했다. 산 정상은 만년설로 덮였으니 물은 충분하나 너무 추워 식물이 살 수 없다. 그러나 이곳, 우리가 서 있는 곳은 물론 여름 한철이긴 해도 따뜻하다 못해 너무 뜨거울 정도다. 물은 한 방울도 없다. 그러니 건조에 견딜 수 있는 자들만이 살아 남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도 여러 번 봤지만 이곳은 비름과에 속하는 곰팡이밑동나무(유로티아 케라토이데스, Eurotia ceratoides) 군락이다. 유로티아는 곰팡이를 뜻하는 그리스어 Euros에서 나온 말이다. 잎의 모양을 빗대어 이렇게 붙였다고 한다. 케라토이데스는 '뿔 모양의' 또는 '뿔 모양의 돌기를 갖는'의 뜻이다. 그러므로 학명의 뜻은 '뿔 모양 돌기를 갖는 곰팡이 모양 잎 밑동나무' 정도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유로티아 속에서 우리는 이 종이 처음 관찰한 종이므로 대표적인 종으로 봐서 곰팡이밑동나무로 했다. 밑동나무는 반관목을 뜻하는 단어로서 이전에 뿌리나무라 했으나 좀 더 의미를 선명하게 하기 위해 이렇게 했다. 사실 뿌리부분이 나무라기보다 밑동부분이 나무이기 때문이다. 이 일대 곰팡이밑동나무들은 높이 50~60㎝, 직경 역시 이 정도의 크기다. 100㎡ 당 10개체 정도가 자라고 있다.

글=국립산림과학원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 서연옥·송관필·김진·김찬수

신앙대상인 ‘오보’ 혹은 ‘어워’

몽골의 풍물 중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몽골을 여행하다 보면 자주 만나게 되는데 특히 탐사를 위해 오지를 다니다보면 그 모양, 크기, 위치 등이 아주 다양함을 보게 된다. 바로 오보라고 알려진 신앙의 한 요소다. 몽골사람들은 이 오보에 경배를 하기도 하고 오보제라고 하여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우리 탐사대의 몽골대원 엥헤는 이 오보를 지날 때면 차에서 내려 특별히 준비한 술을 뿌리면서 이 오보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바퀴 돈다. 그런데 가끔 그가 하는 행동을 보면 모든 오보에 그렇게 경배 하는 게 아니라 특정한 오보에서만 그런 것 같았다.

설 명절 ‘오보’에 경배하는 젊은 부부, 남편이 술을 뿌리는 동안 부인은 기원을 하고 있다. 명절 옷을 입은 어린이들, 탐사대원 엥헤바야르 사랑게렐의 조카들과 필자(2015년 2월 18일 촬영).

이들에게 이 구조물의 이름을 물어보면 우리글로 정확하게 표기할 순 없지만 '어워'라고 발음하는 것으로 들린다. '오보'라고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여러 자료나 인터넷을 찾아봐도 오보 또는 어워를 혼용해서 쓰고 있음을 알게 된다. 간혹 오부라고 하는 경우까지 있다. 영문표기는 'ovoo' 또는 'oboo'다. 이것은 아마도 러시안 알파벳에 대응하는 영어 알파벳으로 옮기면서 이런 혼란이 생기는 것 같다. 러시안 알파벳을 영어 알파벳의 대응 문자로 옮긴다고 해서 발음까지 똑같이 대응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아주 주의해야 할 부분이다. 제주어에는 몽골어 요소가 많다고 한다. 이런 부분을 간과하고 논쟁을 벌이는 경우를 간혹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오보라는 것은 언제부터 몽골에 있었을까? 박원길의 논문 '몽골의 오보 및 오보제'를 보자. 몽골제국시대에 여행자들의 여행기나 사신단의 일원으로 다녀오면서 기록한 보고서들이 있다.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카르디니 몽골여행기, 팽대아와 서정의 흑달사략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엔 오보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러므로 이 당시에는 오보가 없거나 그렇게 활성화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기록들은 주로 청나라 시대에 와서 다수 나타난다. 몽골에서 오보가 본격적으로 확산한 시기는 불교가 쇠퇴하고 샤만 신앙이 부활한 북원시대 초 중기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정황은 1578년 라마교가 전래되고 라마승들이 종래의 샤만 습속을 탄압하면서도 오보에 관해서만은 관대하게 처리했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오보는 대개 고개나 산꼭대기, 샘, 강, 기묘한 모양을 한 언덕, 바위, 중요한 상징을 지니는 나무의 주변 등에 세워져 있다. 그러나 오보가 가장 많이 세워진 곳은 사방을 관망할 수 있는 산꼭대기다.

이런 오보의 위치와 모양, 몽골인의 습속 등을 볼 때 오보의 기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진다. 하나는 단순히 이정표나 경계표의 구실을 수행하는 오보이고 하나는 신앙대상으로서의 위치를 갖는 오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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