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훈의 한라시론] 이순옥의 비원

[김양훈의 한라시론] 이순옥의 비원
  • 입력 : 2020. 12.31(목) 00:00
  • 강민성 기자 kms6510@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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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새해를 맞는다. 신축년 하면 떠오르는 것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제주에는 1901년 신축제주항쟁이 일어난 지 두 번째 육십갑자, 즉 120년이 되는 해다. 신축제주항쟁의 다른 이름들은 신축민란, 이재수의 난, 신축년 난리, 제주민란, 신축교난 등이다. 이처럼 정명이 없이 어지러운 까닭은 제주4·3항쟁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날의 진실은 하나인데 제각기 아전인수로 부르기 때문이다.

한정된 지면에서 세폐(稅弊)니 교폐(敎弊)니 하는 역사적 담론을 떠나 소박한 이야기를 하나 해볼까 한다. 장두 이재수의 누이 이순옥의 이야기다. 당시 대여섯 살 어린아이였던 그녀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억울하게 처형을 당한 오빠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혼신을 기울였다. 그녀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야말로 동분서주, 고군분투였다.

당돌했던 그녀는 오빠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추모비라도 세워달라고 조선총독에게까지 탄원서를 보냈다. 1928년 그해, 그녀는 스물두 살 처녀였다. 그러나 총독 각하는 당연히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 강점기 내내 이어진 천주교회와 일제의 우호적인 관계를 그녀는 알 리 없었다.

그러는 한편, 그녀는 오빠의 의거를 널리 알리기 위해 이재수의 실기 ‘야월(夜月)의 한라산’을 준비했다. 그녀는 국내에서 자신의 책을 출간할 방법이 없자 오사카로 건너가 바느질 등 갖은 고생을 하면서 돈을 모은 후 한경면 훈장 출신 조무빈(趙武彬) 선생을 찾아갔다. 그녀의 구술원고를 다듬은 조무빈 선생은 1931년 오사카에 있는 중도문화당(中島文華堂)에서 ‘야월의 한라산-이재수의 실기’를 출판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

오라비의 실기를 들고 고향에 돌아온 그녀는 사람들에게 책을 나누어 주며 오빠 이재수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려 뛰어다녔다. 이후 평리원에서 엉터리 재판을 받고 처형된 뒤 청파동 죄수 묘지에 묻혔다는 오빠의 유골을 찾는 일에 매달렸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해방 후 이순옥은 각고의 노력 끝에 대정 홍살문 거리에 오빠 이재수를 비롯한 세 장두를 기리는 ‘제주대정군삼의사비’를 세웠다. 그 해는 1961년, 묘하게도 신축제주항쟁 후 첫 육갑이었다. 그러나 그 삼의사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인적이 드문 드랫물에 버려졌다. 천주교 측의 압력 때문이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1997년 마을 청년회가 새로운 삼의사비를 세우면서 그녀가 세웠던 삼의사비는 그 아래 땅속에 묻어버렸다.

"유명무실한 제주목사의 비석은 곳곳마다 세워져 있건만 어찌하여 도탄에 빠진 일반 백성의 원한을 풀고 인정을 펴준 나의 아들의 비석은 없느냐." 이재수 실기에 쓰여 있는 어미의 외침이다. 모슬봉 기슭 공동묘지, 이재수의 어머니 봉분 앞에는 모서리가 둥근 조그만 묘비가 서 있다. 앞면에 '제주영웅 이재수 모 송씨묘'라 새겨있고, 대정골 안성리·인성리·보성리 세 마을 주민 일동이 세웠음을 알리고 있다.

오라비의 신원을 한평생의 소원으로 삼았던 이순옥은 열한 살 조카를 양자로 들여 오라비의 대를 잇게 했다. 때로는 새벽에 목욕 재개하여 정화수를 떠놓고 오라비의 넋을 위로했다. 다행히 ‘1901년 제주항쟁기념사업회’ 등 뜻 있는 사람들이 과거사의 진실을 밝히는 일에 나서고 있다. 새해 신축년은 그녀의 비원을 조금이나마 더 풀어줄 것인가? <김양훈 프리랜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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