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의 하루를 시작하며] 공존하는, 존재의 의의

[김연의 하루를 시작하며] 공존하는, 존재의 의의
  • 입력 : 2021. 02.17(수) 00:00
  • 김도영 기자 doyoung@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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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TV 채널을 돌리다 AI와 인간이 대결하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가수와 모창 AI가 가려진 무대 뒤에서 함께 노래를 불렀다. AI는 우리 일상 곳곳에 스며들었다. 하루를 시작하는 알람과 날씨, 뉴스까지 인공지능 디바이스에 물어보는 모습은 이미 익숙하다. 또한 세상에 없는 이를 눈앞에 보여주고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수도, 그림을 그릴수도 없는 예술가를 재현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익숙한 듯 TV를 보다 노래 사이사이 숨소리마저 똑같은 AI목소리에 잠시 놀라고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과연 인공지능은 어디까지 우리 삶을 변화시킬까. 이러다 정말 인간의 모든 역할을 기계가 대신하는 현실과 마주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애초에 예술과 기술은 하나의 뿌리에서 기인했다. 17세기 이후 근대과학이 발전하며 과학과 예술은 멀어졌지만 현대에 과학과 예술은 다시금 하나의 뿌리에서 뻗어나가는 다양한 가지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 기존의 컴퓨터는 정해진 알고리즘을 바탕으로 작동했지만 현대의 AI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조합하여 상황에 맞는 판단을 내린다. 사람의 뇌처럼 학습을 하고 모방과 융합의 과정을 거처 창조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AI 딥러닝 기술은 문학, 미술, 음악의 경계를 무너트린 새로운 예술의 미래를 열었다. AI화가 '오비우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개발한 AI화가 '더 넥스트 렘브란트', 그리고 세계 최초로 팝송을 제작한 AI '플로우 머신즈'까지 조만간 우리는 그때그때 듣고 노래와 음악을 AI음악가가 들려주게 될 것이다. 바둑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었듯 예술도 과연 그러할까. 혹은 딥러닝 기술이 예술가의 창작력을 자극하고 함께 협업하여 새로운 예술의 미래를 개척하게 될 것인가. 물론 지금도 AI와 예술의 만남은 일상 곳곳에 스며들었으나 진화의 한계가 어디까지일까. 이러한 의문 뒤에는 설렘보다 어쩐지 쓸쓸함이 밀려왔다. 그것은 아마도 예술가의 한 사람으로써 느껴지는 우려 때문일 것이다.

문화예술분야에서는 이러한 논란도 제기되고 있다. AI가 만든 작품을 대중이 만족하고 즐긴다면 예술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단지 기계적인 학습에 기인했으므로 자신만의 감성과 의미가 담긴 문화예술과 차별성을 두어야 하는지 말이다.

AI시대, 문화예술은 다양한 형태로 확장 변형되고 있다.

변화에는 많은 질문과 숙제가 뒤따른다. 모든 변화는 삶과 연결되어 있고 궁극적인 목적은 일상을 윤택하게 만드는 길로 흘러가야 하기 때문이다.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다. 예술 작품을 통해 얻는 다양한 감동들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공존해야 한다면 각각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이 만든 과학기술이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 삶을 이롭게 만드는 도구로 쓰여야 하기 때문이다.

가수와 모창AI의 대결은 가수의 승리로 끝났다. 인간이기에 순간의 감정이 노래 마디마디에 묻어났다. 지금까지 예술은 그러했다. 뚜렷하게 정의내릴 수 없고 그리하여 전복적이고 여전히 바닥을 볼 수 없는 미궁 같은 것. 앞으로도 삶이 지속되는 동안 그러하지 않을까. <김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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