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제주살이] (1)귤 창고

[황학주의 제주살이] (1)귤 창고
  • 입력 : 2021. 09.07(화) 00:00
  • 최다훈 기자 orca@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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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밭엔 나무와 열매 말고도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것들
제 방식으로 울고 노래하며




황학주 시인이 8년째 제주에 살며 보고 만난 이웃들, 제주 보통 사람들의 모습을 담백하고 편안한 글에 풀어놓습니다. 매주 화요일 '황학주의 제주살이'를 통해 만날 수 있습니다.



오전 열 시 1t 트럭이 귤 농장 안으로 들어와 멎는다. 나는 우리 집 2층에서 귤밭을 내려다보고 있다. 여인이 내리자, 적재함이 빈 흰색 트럭은 귤밭 사이로 들어가 이내 시야에서 보이지 않는다. 품이 넓은 감색 바지에 회색 셔츠를 입은 여인은 길을 따라 걸어와 곧장 창고 안으로 들어간다.

오십 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저 농장 주인 부부와 여러 번 집 앞에서 마주친 적이 있다. 농장이 우리 집과 이웃하고 있는지라 평소 눈인사 정도는 하고, 오늘 날씨가 참 좋다는 말도 하고 지낸다. 남편은 무뚝뚝하고 여인은 서글서글한 형이지만, 두 사람 다 귤 농사로 잔뼈가 굵은 농부들이라는 것을 몸 전체에서 알 수 있다.

그들은 윗마을 와흘리에 산다. 와흘리는 메밀밭으로 유명한 마을이고, 나는 그 드넓은 돌밭에 메밀이 자라 올라 촘촘히 박히고 이내 하얀 메밀꽃 천지가 되는, 황무함과 생명감이 뒤섞이는 시간의 와흘리를 좋아한다. 점심때가 되자 키 크고 구부정한 남자가 창고 안으로 들어간다. 아마도 집에서 싸 온 도시락을 먹고, 그런 후엔 언젠가 나도 본 적이 있는 분홍색 텀블러에서 커피를 따라 먹는지 모르지.

귤밭엔 귤나무와 귤 열매만 있는 게 아니라 정적과 나른함과 귤잎에 반짝이는 햇빛이 있고, 자세히 보면 뿌려져 있는 퇴비, 잡풀과 돌멩이, 나무토막과 떨어진 잎, 사방으로 연결된 급수관과 스프링클러, 암반들이 있고 암반 근처 빈 땅엔 달리아가 달리아 옆엔 해바라기가 심어져 있다. 거기에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많은 생물들이 어김없이 제 방식으로 제자리를 차지하고 살고 지나다니고, 울고 노래하며 함께 있다.

이 농장에 창고는 저것 한 채뿐이다. 다른 창고와 별반 다를 바 없으나 창문이 있는 게 특색이며, 돌 사이사이 흰색 시멘트를 꼼꼼히 넣어 지어진 것으로 옛 돌집 맛과 새뜻한 느낌을 동시에 준다. 나는 창고를 계속 바라보고 있다. 캡 모자를 쓴 남자가 창고에서 나와 다시 귤밭 사이로 들어가고 바다에서 솟은 해가 머리 위를 지나 산 위로 점점 이동하지만 여인은 창고에서 꼼짝않고 나오지 않는다.

길에서는 귤나무들에 가려 창고 출입문이 보이지 않아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길이 없다. 창고 창문이 있는 쪽 벽면은 우리 집 2층에서 잘 보인다. 그 창고 안 한 켠은 넓은 책상과 꽤 많은 책들로 차 있다. 여인은 귤밭이 언덕을 비탈져 내려가 바다 앞에 이르는 것을 볼 수 있는 창가에 아직 앉아 있다. 아마도 오늘은 천 평이 넘는 귤밭에 일생 매달려 살아온 여인에게 휴식이 주어진 어느 한 날일 것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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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학주 시인은 1987년 시집 '사람'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갈 수 없는 쓸쓸함', '늦게 가는 것으로 길을 삼는다', '너무나 얇은 생의 담요', '사랑할 때와 죽을 때', '사랑은 살려달라고 하는 일 아니겠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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