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詩읽는 화요일] (10)시(詩)(허수경)

[황학주의 詩읽는 화요일] (10)시(詩)(허수경)
  • 입력 : 2023. 03.14(화) 00:00  수정 : 2023. 03. 14(화) 09:23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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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허수경



낫을 가져다 내 허리를 찍어라

찍힌 허리로 이만큼 왔다 낫을

가져다 내 허리를 또 찍어라

또 찍힌 허리로 밥상을 챙긴다



비린 생피처럼 노을이 오는데

밥을 먹고

하늘을 보고

또 물도 먹고

드러눕고

삽화=써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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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이만큼 왔다. 스스로 내 허리를 낫으로 찍어 내가 바르게 갈 수 있도록,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아야 이만큼, 이만큼 시를 쓸 수 있다. 내 허리를 사랑했던 연인들이여, 나의 눈부신 독자들이여. 한눈을 팔지 않도록 내 허리를 찍어다오. 언제나 몸이 아프도록. 비린 생피를 흘리며 거짓과 위선과 부정을 뿌리칠 수 있게, 세간의 사랑과 가난과 허무를 견딜 수 있도록. 시여 내 허리를 찍어다오. 아무 사연 없이 시가 올 수 없으니, 내가 없어지고 시인이 탄생하기 위해 얼마나 허리를 찍으며 가야 할지. 시인의 피여, 목청껏 목청을 다한다. 과연 언제쯤 시에 대해 널널해질 수 있을까, 묻던 허수경은 5년 전 54세의 나이에 지병으로 별세해 독일 뮌스터에 외롭게 묻혔다. 허리를 찍힐 때 나는 비명소리가 시란 듯, 그 피가 시의 꽃이란 듯 시를 쓰며 그 시들로 밥상을 차리며, 또 생활의 밥상을 챙기며 살다 갔다. 대체로 한 시인이 쓴 시 속엔 한 시인만 살다 간다. 서럽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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