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농업유산-제주의 화전(火田)] (2)국영목장의 조성과 화전

[잊혀진 농업유산-제주의 화전(火田)] (2)국영목장의 조성과 화전
외세의 수탈·봉건왕조의 제주 지배 맞물려 애환·부침
  • 입력 : 2023. 07.20(목) 00:00  수정 : 2023. 08. 20(일) 18:07
  • 이윤형 백금탁 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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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2023072001-01010701.pdf(1)

경작지 부족·식량난 타개위해
목장 내 화전 개척, 조정은 금지
19C 말 정책적으로 허용 시작
중산간 지대 마을 형성 배경
국가 정책따라 애환·고초 겪어

[한라일보] 한반도의 다른 지방에 못지않게 제주에서도 화전 경작은 일찍부터 이뤄졌다. 문헌 등 기록을 통해 제주에서의 화전의 본격적인 등장을 들여다보면 외세의 수탈과 봉건왕조의 지배 등과 맞물려 있다.

조선 세종대 제주인 고득종(1388~1460)이 조정에 보낸 상소문은 화전의 실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고득종은 조정에서 지금의 서울시장격인 한성부판윤이라는 고위직을 지낸 인물이다. 제주인으로서는 최고위직에 올랐다. 그는 당시 화전 경작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상소한다.

'신의 고향인 제주는 초목이 무성하였을 때에는 좋은 말이 번식할 수 있었사오나, 무술년(1418) 이래로는 사람들이 땅을 많이 갈아 일으켜서 수초(水草)가 점점 부족하게 되었나이다. … 무식한 무리들이 많이 들불을 놓아 밭을 갈므로, 만일 이런 것을 금하지 아니하면 지기(地氣)가 초란(焦爛)하여지고 산에는 초목이 없어져 말을 번식할 수 없을 것이 뻔합니다.'

이 기록은 조선초에도 불을 놓아 경작지를 만들어 농사를 짓는 화전이 상당히 많이 행해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화전으로 인해 산간지대에 초목이 없어지고, 말을 번식시키는 것이 어렵다는 내용이다. 산림이 훼손되고, 말을 사육하기가 어려우니 화전 경작을 금지하자는 것이다.

'제주군읍지 제주지도'의 일부. 화전동(붉은색 원) 9곳이 뚜렷이 표기돼 있다. 타원형으로 그려진 선은 상잣을 나타낸다. 오른쪽 아래 그림은 '제주군읍지 제주지도' 전도.

국마를 기르는 국영목장에서의 경작은 목장 설치 초기부터 금지됐다. 그렇지만 목장지대에서 화전 경작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국영목장 설치로 인해 제주섬 전체적으로 경작할 공간이 줄어들고, 이로 인해 식량 등을 확보하는 것이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제주에서의 목장 설치는 몽골제국의 제주 간섭기에서부터 비롯됐다. 고려 충렬왕 2년(1276) 오늘날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 일대 수산평에 국영목장인 탐라목장을 설치하면서 목장지대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몽골은 탐라목장을 관리 운영하기 위해 목축전문가인 목호(牧胡·하치)를 파견했다. 충렬왕 3년(1277)에는 수산평에 동아막을, 한경면 고산리 일대에는 서아막을 설치하여 탐라목장을 관리 감독하는 지배체제를 갖춘다.

고려 말기 제주의 목마장은 몽골의 14개 목장 중 하나로 간주될 만큼 규모가 컸다. 이후 점차 한라산 중심으로 8개 목장이 되고, 이것이 시초가 되어 조선 전기에는 10소장(十所場)으로 확대된다. 고득종은 목장을 해안지대에서 중산간지대로 이설할 것을 제안하여, 세종 11년(1429) 8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120여 리에 걸쳐 잣성을 쌓아 10개의 목장이 만들어졌다. 중산간 목장을 설치하면서 344호를 목장 밖으로 이주시켰다는 실록 기사는 목장 예정지인 중산간 지대에 이미 촌락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 시기는 조선 태종 2년(1402) 탐라국을 상징하던 호칭인 성주·왕자 직위가 폐지되면서 제주는 중앙왕조의 절대적인 지배아래 놓이게 되는 시기와 맞물린다. 제주에 대한 중앙 왕조의 지배가 더욱 공고해진다.

국마를 양성할 목적으로 조성된 국영목장이었기에 경작은 엄격히 금지됐다. 이는 제주도 전역을 방목지화 하다시피 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후에도 화전이 성행하면서 17세기 중엽에 화전을 금하는 정책이 취해진다. 산허리 이하에서만 화전을 허락하게 되는데, 산허리 이하라도 이미 화전이 있는 곳은 허용하되 새로 일구는 행위는 금지했다. 화전세도 부과됐다. 17, 8세기에 들어서 화전은 어쩔 수 없이 현실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에 따라 타협책으로 '산허리 이하'는 수용하되 산림훼손을 방지하기 위하여 '산허리 이상의 화전'은 제한하게 된다. 그렇지만 화전은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갔다. 정약용의 '경세유표'(1817~8년)에서도 "우리나라는 산악이 국토의 ¾이므로 화전 면적이 평지와 비슷하다"고 할 정도였다.

서귀포시 서홍동 연자골의 화전민 가옥.

화전 경작이 정책적으로 허용된 것은 19세기 말이다. 1894년 공마제(貢馬制)가 폐지되고, 더 이상 공마 공급은 중지됐다. 공마제 대신 1897년부터 금납제가 시행되면서 500여 년 가까이 유지되던 10소장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이 시기부터 10소장과 산마장에서 화전 경작이 허용된다. 이는 국영목장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방치하기 보다는 화전 경작을 합법적으로 허용함으로써 화전세를 거두려는 의도가 있었다.

국마장 내에서 또는 국마장 위쪽인 상잣성 이상 지역에서도 화전 경작이 허용됐다. 화전민이 늘어나고 화전마을이 곳곳에 자리한다. 한라산 중산간 및 고산지대로 화전 마을의 공간적 확산이 이루어지는 배경이다. 제주도 전 지역으로 띠를 두르듯이 화전이 확대되어 갔다.

이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옛 지도가 있다. 구한말인 1899년(광무 3) 5월에 제작된 '제주군읍지 제주지도'는 당시 제주의 인문지리와 마을, 주요 오름 등을 상세히 수록하고 있다. 전국 읍지 편찬의 일환으로 제작된 이 지도는 읍지에 첨부된 지도이지만 그 내용이 매우 상세하다. 무엇보다 10소장의 위치와 경계, 상잣성·하잣성, 국영목장 등이 자세히 표기돼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화전마을(화전동)이 구체적으로 표기돼 있다는 점이다. 화전마을 즉 화전동은 모두 9곳이 등장한다. 화전의 위치를 보면 1소장과 10소장 사이 현 성불오름 위쪽 조천읍 교래리 일대, 3소장 물장오리 오름 아래쪽, 3소장과 4소장 사이에 각각 1곳씩이 나타난다. 이어 5소장에서 8소장 사이 4곳, 9소장 위쪽으로 2곳의 화전마을이 있다. 이들 화전마을은 모두 상잣성 위에 위치하는 특징을 보인다. 이는 국영목장을 넘어선 산간지대에서도 화전이 이뤄지고, 화전마을이 형성됐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중산간 지역에 마을들이 자리하게 된 데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깔려 있다.

무주공산의 광활한 한라산 평원지대에 화전을 일구던 백성들은 고려말, 조선초기부터 국영목장의 설치 등 국가정책에 따라 애환과 고초를 겪었다. 잣성을 축조하기 위해 노동력이 동원되고 화전을 일구며 살았던 삶의 터전에서 쫒겨나기도 했다. 이러한 화전은 외세로부터의 수탈과 탐라의 자주성 상실 및 봉건왕조의 제주 지배 이면의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상징적 유산이다. <특별취재팀=이윤형 편집국장·백금탁 제2사회부장/ 자문=진관훈 박사·오승목 영상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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