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詩읽는 화요일] (32)-그만큼의 거리에서-윤옥주

[황학주의 詩읽는 화요일] (32)-그만큼의 거리에서-윤옥주
  • 입력 : 2023. 08.29(화) 00:00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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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의 거리에서-윤옥주




밤의 뼈들을 따뜻하게 보낼 수 없어서

나는 하루를 쓰고 당신은 밤을 낭비한다



눈앞에 발 없는 길이 펼쳐진다 너무 많은 계절이 완성된다



일정한 보폭으로 걸어가는

밤의 고리에 꼬리가 깊숙이 물려 있다

나는 얼굴을 내밀고 당신은 등을 보이며



한 송이 한 송이 나아가던 사랑도

끊어지지 않는 그만큼의 거리에서

한 그늘, 잠시 쉬어가는 거다



일정한 간격으로 박음질 되는 자작나무 숲

나는 생의 이면(裏面)까지 깨끗한 흰 건반을 칠 생각이고

당신은 꿈의 머리맡에서

더욱 깊어지는 사람이 된다

삽화=써머



밤이고, 걸어가는 일은 꽃송이를 떨어뜨리는 시간의 발 없는 길을 가는 일이다. 시가 쓰이는 순간은 밤으로부터 아직 당신의 따뜻함을 앗기지 않는 때이고, "당신"이 박음질을 하듯 나아가며 등을 보이는 장면의 어디쯤에서 비롯한다. 그렇게 밤의 고리는 꼬리를 이으며 지나가는 세계이지만, 시인은 생의 이면까지 가야 할 자신을 개진하며 자작나무 숲을 따라간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그늘, 잠시 쉬어"가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처음부터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사랑하는 자들의 문채(文彩)와 다름없다. 한 송이가 지면 또 한 송이가 지는 사랑을 짐짓 잊히지 않을 만큼의 거리라 믿어지는 "그만큼의 거리"에서 뒤쫓는 하루는 간다. 밤이고, 모든 사랑은 예외적인 사랑이다. "생의 이면까지 깨끗한 흰 건반을" 치며 따라갈 생각이지만, 그리도 아름답건만 사랑의 비밀밖에는 아직 결과를 알려주지 못한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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