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농업유산 제주의 화전(火田)] (3)떠난 사람들, 남겨진 흔적들-⑧안덕면 동광리-화전과 민란

[잊혀진 농업유산 제주의 화전(火田)] (3)떠난 사람들, 남겨진 흔적들-⑧안덕면 동광리-화전과 민란
온갖 핍박에 항거한 민란 진원지… 역사 재조명해야
  • 입력 : 2023. 10.19(목) 00:00  수정 : 2023. 10. 19(목) 15:09
  • 이윤형 백금탁 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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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부터 사통팔달 발달한 교통요지
마을 생기고 화전민들 몰려들어
19c 후반 잇따른 민란 중심무대
중요한 역사현장임에도 잊혀져가
제주사 공백기 남아… 채워나가야


[한라일보]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육거리는 제주 서남부 지역의 관문이다. 예전부터 제주목과 대정현을 연결하는 관도(官道, 지금의 평화로)의 요충지로 원(院)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됐다. 조선시대에는 제주의 주요 관도를 따라 광제원(원동, 애월읍 소길리 지경), 제중원(원동, 조천읍 대흘리 지경) 등이 위치했다. 동광육거리 일대에는 이왕원(利往院)이 있었다. 출장을 오가는 관리들을 위해 설치한 숙식시설이다.

동광육거리에 서면 시대를 달리하며 아로새겨진 제주 역사, 경제적 수탈에 항거하며 울분을 토하던 화전민들의 삶을 마주하게 된다. 제주시와 서귀포시, 모슬포, 한림, 산록도로 방면 등으로 사통팔달 길이 연결된데다, 광활한 초원지대가 있어 굵직한 역사적 격변의 무대가 된다. 사람들이 모여들고 마을이 형성됐다. 마을은 시대에 따라 이름을 달리하며 변천을 거듭한다.

사통팔달 도로망이 뻗은 안덕면 동광육거리 일대. 이 일대는 예부터 마을이 형성되고 화전 농사가 활발히 행해졌다. 19c 후반 제주에서 일어난 잇단 민란의 진원지다. 오른쪽 상단 뾰족 솟은 오름이 대병악이다. 특별취재팀

동광리는 본래 '자단리(自丹里)'에 속했다. 1625년(인조 3년)경 동광리와 서광리는 '자단리'로 불리다 1872년(고종 9년) '광청리'(光淸里)가 되었다. 자단리로 부르게 된 것은 삼별초와 관련이 있다고 전해진다. 삼별초 본진이 제주로 들어온 것은 고려 원종 12년(1271) 5월이다. 이에 앞서 삼별초는 1270년 11월 명월포로 상륙하여 진을 치고 있었다. 삼별초는 항파두리성을 비롯 환해장성 등을 구축했다. 이 당시 가혹한 노역에 견디다 못한 고씨, 김씨, 양씨가 탈출하여 '자단이 곶' 일대에 숨어 살기 시작하면서 '자단리'라는 마을이 형성됐다.

'대정군읍지 대정지도'에 '신청리'(新淸里, 새광쳉이)로, 1872년 '제주삼읍전도 대정군지도'에는 '광청리'(광쳉이)로 표기되었다. 1898년(광무 2년) 동광리는 광청리에서 분리하여'신청리'라 하였다. 이어 1904년 '삼군호구가간총책' 대정군 중면에 '동광청'(東光淸)으로, 일제강점기 지도에는 '동광리'(東光里), '무전동'(舞田洞), '조숙개동' 등으로 표기되어있다.

동광리에는 4·3잃어버린 마을인 삼밧구석과 무동이왓이 있다. 삼밧구석은 1670년(헌종 11년)경 마을 서부에 광산 김씨가 입주하여 삼(麻) 농사를 짓게되면서 '삼밧구석(麻田洞)'이라 부르게 됐다. 그후 1700년대 제주 양씨, 진주 하씨 등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이후 '무동이왓(舞童洞)'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커졌다. '무동이왓'은 오래전 한 풍수사가 이 일대의 지형 지세를 보고 "춤을 추는 어린이를 닮았다(舞童)"라고 말한 데서 연유한 이름이다.

화전민들 역시 이 일대에 모여들어 화전 농사를 하며 생활을 했다. 이 일대는 중요한 화전촌이었다. '제주군읍지 제주지도'(1899)에 표시된 화전동 9개소 가운데 3개소가 동광리 지경을 포함한 대정현 일대에 조성될 정도로 밀집됐다. 다른 지역에 비해 화전민이 많이 살았다. 화전세는 소장 별로 부과됐다. 화전세만이 아니다. 법으로 개간이 금지된 목장에 들어가 경작을 하기도 했다. 그럴 경우에는 목장세도 부과됐다. 근근이 생활하는 화전민들에게는 그 부담이 만만치 않았다. 화전민들은 한낱 국가의 소작인에 불과한 존재였다.

1900년(광무 4년) 봉세관 강봉헌이 작성한 '대정군각공토조사성책'을 보면, 광청(현 동광리) 지경 새왓(모초전, 茅焦田) 63바리(태, 駄)에 31냥 5전, 서광청(현 서광리) 지경 모초전 66바리에 33냥 화전세를 징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태'는 마소의 등에 가득 실은 짐을 세는 단위 즉, 바리를 말한다.

19세기 후반 결국 과도한 화전세가 문제가 되어 민란이 일어난다. 강제검 난(1862), 방성칠 난(1898) 진원지가 이곳 동광리 일대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후 불과 3년 뒤에 일어난 이재수 난(1901) 역시 화전세 등 과도한 세금이 주된 원인중의 하나다.

강제검(미상∼1863년)은 무동이왓 출신이다. 이 지역 노인들은 그가 한때 향리로 있었기 때문에, 강제검을 '강형방(刑房)'으로 기억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 무동이왓 위쪽에 강제검의 집터와 무덤이 있었다고 했다. 민란은 1862년 9월 6일 대정현 덕수리에 거주하는 화전민 김석란이 광청리에 거주하는 김두일에게 금년도 화전세가 터무니없이 높다는 내용의 통문을 보내면서 시작되었다. 여기에는 화전민 1000여 명이 함께 했다.

'방성칠 난'은 제주 목사 이병휘의 화전세, 목장세에 대한 과도한 수탈에 항거하여 일어났다. 난을 주도한 방성칠(房星七)은 전라도 출신으로 1891년 제주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지금의 제주시 오라 능화동에 거주하며 화전 경작을 하다가 이후 동광리로 옮겨와 포교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방성칠 난은 1만 명 이상의 참가하였으며, 3년 뒤 이재수 난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일제강점기인 1918년 일어난 법정사 항일운동에도 연결된다. 당시 항일운동에 앞장선 보천교의 포교 본부가 동광리에 있었다. 중문면 하예리 출신 강승태가 안덕면 동광리에 포교 본부를 두었다.

옛 화전 마을 동광리 무동이왓 일대는 제주 민란의 중심 무대다. 동광육거리에 서면 삼별초에서부터 민란에, 4·3 난리통에 수난과 고통으로 점철진 이 일대 화전 마을과 화전민들이 그려진다.

그렇지만 온갖 핍박에 울분과 격정을 토해냈던 이들의 흔적은 이곳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제주 역사의 중요한 순간을 장식했던 현장들이 무관심속에 잊혀져 가고 있는 현실이다. 4·3으로 인한 피해가 큰 탓에 화전, 화전민들의 역사는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채 외면 받아왔다. 제주 역사 연구의 공백기로 남아있다. 학계는 물론 제주 사회가 이들의 역사를 온전히 되살리는데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진관훈 박사는 화전 역사 문화 재조명 필요성을 강조했다. 진 박사는 "동광리 '무동이왓'은 제주민란의 발생지이며, 법정사 항일운동에 앞장선 보천교의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게다가 대몽항쟁의 상징인 삼별초의 이면에 가려진 제주도민들의 아픔을 간직한 곳"이라고 말했다. 이어 "제주4·3을 뛰어넘어 수백 년 제주역사를 관통하는 동광리의 화전 역사와 문화를 재조명할 때"라며 "이러한 노력이 모여 제주 역사를 두텁게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특별취재팀=이윤형 편집국장·백금탁 행정사회부장

자문=진관훈 박사·오승목 영상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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