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정묵의 하루를 시작하며] 40년이 지나도 빛이 나는

[좌정묵의 하루를 시작하며] 40년이 지나도 빛이 나는
  • 입력 : 2024. 11.13(수) 05:00  수정 : 2024. 11. 13(수) 08:28
  • 임지현 기자 hijh529@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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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요즘 누가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라고 한다면 별 설득력이 있는 말이 못 된다. 왜냐하면 십 년이 아니라 2, 3년만 해도 강산이 변하고 도시가 변하고 나라의 땅덩이가 변할 수 있는 과변화(過變化)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40년이라면 어떤 변화를 예상할 수 있을까. 강산이 네 번이나 뒤집히며 바뀐다는 세월이다. 제주시 탑동 공유수면 매립이 1980년대 후반이었다. 그리고 이제 40년 가까이 지났다. 몽돌 위로 넘실거리는 바닷물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리고 무엇이 사라지고 말았을까.

10월부터 지금까지, 마흔에 시인이 돼 그 후로 꼭 40년을 시인으로 살다가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난 문충성 선배에 대한 시인론(작가론)을 쓰고 있다. 꼭 마흔에 시인이 됐다는 이력은 특이하다. 왜냐하면 대부분 시인으로는 젊은 시기에 등단하는 경우가 보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또 40년을 시인으로 치열하게 살았다는 사실이다. 1978년 첫 시집 '濟州바다'를 내고 2016년에 마지막 시집 '귀향'을 내놓아서 40년이 좀 미치지 않지만, 그 후로도 작품을 발표했으므로 201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40년을 오직 시를 썼다.

고교 1학년 때의 추억이다. 지금은 둘도 없는 친구인 '상온'이와 학교 뒤 수돗가에서 싸웠는데 코피가 나면서 싸움은 끝이 났다. 하교 후 스쿨버스를 타고 동문 로터리에서 내려 산지천을 지나고 탑동을 거쳐 집으로 갔는데, 도중에 탑동 방파제에 혼자 앉아 밀려오는 바닷바람과 파도 소리로 얼굴을 씻고 분을 삭일 수 있었다. 그날 코피의 훈장들은 그 탑동 바다에 뿌려버렸다. 이때가 1978년의 일이다. 이제 40년이 훨씬 지난 추억이다. 그때 동그란 얼굴의 상온이는 어느 곳에서 분을 삭였을까.

40년을 하나의 일로, 한 모습으로 삶을 지켜내며 살아간다는 것은 내게는 어쩌면 숭배의 대상이 되고도 남는다. 시인 문충성 선배님이 내게는 그렇다. 11월 초 고향 시골 중학교 총동창회운동회가 있었다. 이날 1980년 이후로 단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던 동창을 만나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등을 어루만지고 머리를 쓰다듬고 했지만, 반가움을 다 풀지도 못하고 다른 일정으로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 '40년'도 지난 모습이었다. 그때보다 더 빛이 나는 얼굴을 보면서 한없이 고마웠지만 돌아오면서 나는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서울의 삶에서 별로 치열하게 살지도 못했는데 치명적인 병을 얻고 거의 죽을 몸으로 고향 제주로 내려왔다. 그해 집 밖을 나서기조차 힘들어할 때 친동생처럼 여기는 성우 형이 거의 매일 집으로 와서 그렇게 못살게 굴었다. 뭘 잔뜩 들고 와서 억지로 먹으라고 하질 않나, 힘들어도 좀 걸어보자며 바닷가로 들길로 끌고 가질 않나. 지금 생명을 얻었다면 그때 성우 형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 선배가 아프다고 한다. 40년 빚을 진 느낌으로, 선배님께 무엇으로 힘이 될 수 있을지 몹시 두렵다. <좌정묵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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