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노스페라투] 나의 비밀 지옥

[영화觀/ 노스페라투] 나의 비밀 지옥
  • 입력 : 2025. 03.10(월) 02:00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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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스페라투'의 한 장면.

[한라일보] 산 자들은 죽은 자를 두려워 한다. 죽은 뒤에 넋으로 남는 '귀신'이라는 불분명한 형체에게는 더욱 그렇다. 확인할 수 없으나 감지할 수 있는 그것이 '죽음'이라는 공포와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이들 하는 말이 있다. '귀신보다 무서운 것이 사람'이라는. 보이지 않고 느껴지는 공포보다 보이지만 느껴지지 않는 산 자들이 내포한 위협의 가능성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귀신보다, 살아있는 타인보다 무서운 것이 나 자신이라는 것을 살다 보면 우리는 어느 순간 알게 된다. 미세한 공포의 입자를 입체적으로 만들어 환영마저 다채롭게 변형시키는 것은 모두 나의 마음 속에서 일어난다. 내 속에는 내가 너무 많다. 모르는 나들이 언제 어떻게 뚫고 나와 나를 할퀼 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한 밤의 귀신보다, 품 속에 칼을 간직한 타인보다 고요하게 일렁이고 출렁이다 기어코 해일로 나를 덮치는 내 안의 공포가 나는 제일 두렵다.



로버트 애거스 감독의 '노스페라투'는 1922년 만들어진 최초의 뱀파이어 영화 '노스페라투'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무성 영화였던 원작은 독일 표현주의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으로 리메이크 작은 '더 위치','라이트 하우스', '노스맨'이라는 개성이 뚜렷한 작품들을 만들어 온 로버트 애거스가 연출을 맡았다. 오랜 시간 통제할 수 없는 강력한 힘에 이끌려 악몽과 괴로움에 시달리던 엘렌(릴리 로즈 뎁)과 그녀의 남편 토마스(니콜라스 홀트), 그리고 기이한 존재 올록 백작(빌 스카스카드)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노스페라투'는 고딕 호러의 을씨년스러운 아름다움을 빼곡히 담아낸 촬영의 묘미가 특히 눈에 띄는 작품으로 올해 아카데미 촬영상 후보에 오른 작품이기도 하다. 미니멀한 공포의 정수를 담아낸 원작에 비해 리메이크 된 '노스페라투'는 시청각적으로 훨씬 풍성해졌다. 어둠을 캔버스처럼 활용하는 로버트 애거스 특유의 화면은 극장 스크린에서 더욱 빛을 발하고 미술과 편집, 음향 등 기술적인 요소들도 훌륭하다. 천천히 옥죄어오듯 공포를 객석에 전염시키는 '노스페라투'는 전개가 빠른 편은 아니지만 엔딩까지 주저하지도 않는 영화다.



인간의 피를 취하는 귀신, 흡혈귀는 다른 종류의 귀신들과는 좀 다르다. 거리감의 측면에서 그렇다. 흡혈귀가 인간의 몸을 물어 피를 취하려면 당연히 밀착된 거리를 필요로 한다. 타인의 신체와 맞닿아야 하는 흡혈귀의 공포는 그래서 영적이라기 보다는 육적인 뉘앙스를 갖는다. '노스페라투'의 엘렌은 욕망하는 인물이다. 알 수 없는 정체를 향한 그녀의 맹렬한 성적 욕망은 한 순간 다른 존재의 욕망과 충돌한다. 몸의 자발적 요구라는 측면에서 이것은 접신과는 좀 다른 작용이다. 엘렌으로부터 시작해 욕망에 사로 잡힌 채로 욕망을 먹어 치우려는 자들의 기이한 접점이 만들어지고 이제 엘렌은 그가 갈구하는 대상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마치 불길이 번지는 것처럼 영화는 어둡게 타오르는 그림자를 산 자들의 욕망 위로 드리운다. 원작에서는 창백한 이미지로 시각화 되었던 올록 백작은 로버트 애거스 감독 버전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모두 갖고 있는 입체적인 존재로 변모했다. 썩어가는 동시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육체성이 두드러지는 캐릭터로 말이다. 영화의 후반부 엘렌의 욕망과 올록 백작의 욕망이 충돌하는 클라이맥스는 지독할 정도로 파괴적인 에로스인 동시에 각자가 가진 욕망의 실체를 마주하는 선명한 공포의 가시화에 다름 아니다. 로버트 애거스 감독은 내내 청회색과 암갈색으로 조율하던 화면의 균형을 깨트리며 그 실체의 고통스러운 흔적을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마치 등불을 향해 뛰어든 불나방의 사체를 형광등 아래에 두는 것처럼.



'노스페라투'는 인상적인 고딕 호러 영화다. 이 오래 전 이야기가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낮과 밤이 없는 욕망의 비수면 상태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 느낄 공포가 그저 '오래 전 흡혈귀 이야기의 공포'여서만은 아닐 것이다. 욕망을 먹어 치우려다 욕망에 먹혀버린 어둠의 밤들이 누구에게나 흉터처럼 남아 있을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찌할 수 없는 미량의 욕망이 내 안에 잔존함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신의 존재는 나를 귀신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고 선량한 타인들은 나를 악한 타인들 곁에 머무르지 않게 도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안의 나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뿐이라는 것은 다행인 동시에 무서운 일이다. 어떤 천사도 재건할 수 없는 나의 비밀 지옥, 그 문을 다시 열 수 있는 열쇠가 아침의 햇빛으로 인해 완전히 연소되기를 바랄 때가 있다. 타인은 지옥이 아니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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