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훈의 제주마을 백리백경.. 가름 따라, 풍광 따라] (86)애월읍 유수암리

[양기훈의 제주마을 백리백경.. 가름 따라, 풍광 따라] (86)애월읍 유수암리
  • 입력 : 2025. 04.11(금) 03:30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한라일보] 마을 이름이 역동적이다. 흐르는 물이 주는 지속적인 메시지. 결코 고여서 썩지 않는 진취성의 상징이다. 찬연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공간을 보자. 해발 1000m가 넘는 노로오름에서부터 노꼬메오름 동쪽과 족은노꼬메오름을 타고 내려오면서 궷물오름을 지나 장전리와 인접한 지역까지 무려 40여 개가 넘는 크고 작은 동산들로 견고하게 짜여 있는 모습. 궤네기동산, 꽝남동산, 건내미동산, 덕훼동산, 도로쇄동산, 볼레남동산, 소로기동산, 싸리비동산, 지금이동산 등 가히 동산으로 빚어진 마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김형철 이장

산이 높으면 공이 길다고 했다. 골이 깊으면 물이 고이고 샘이 솟아난다. 그 생명수를 기반으로 오묘한 땅의 맥박을 느끼던 사람들이 모여 살아왔다. 풍수지리가 사회적 통념이었던 옛날, 항몽삼별초군과 함께 따라온 고승이 절산 아래 샘을 따라서 조그만 암자를 지어 태암감당이라 이름 짓고 살기 시작한 것이 설초의 시초라고 한다. 조선이 개국되고 중산간 지역에 목장지대 기능을 부여해 10소장을 만들 때, 5소장과 6소장의 경계인 허문도에 마통을 둬서 마필을 점호했으므로 여기에 종사하는 목자와 화전민들이 거문이물 주위로 모여들어 한 마을을 이루니 그 마을 이름을 '거문덕이'라고 하였다. 그 후에 1590년 경, 지방토호의 한 사람인 좌수 홍덕수가 많은 사람을 이주시켜 유수암천을 중심으로 모여 살게 했다. 그 당시의 정주공간 큰 틀이 지금까지도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금덕리로 부르다가 1995년 옛지명 찾기 차원에서 마을주민들의 뜻을 모아 지방자치 조례에 따라 찬란한 정신물화를 꽃피워 온 조상들의 얼이 담긴 流水岩(유수암) 이란 옛 이름을 다시 찾아 1996년 1월부터 마을의 행정명, 법정명으로 다시 쓰게 됐다. 전통적 가치에 대한 마을 주민들의 의식 수준이 얼마나 높은 지 보여주는 사례.

그러한 향토애의 뿌리는 선조들이 신성시 했던 것을 계승하려는 의지에 있다. 대표적인 것이 五方石(오방석)이다. 마을 중앙에 솔동산석과 동쪽에 동입석. 서쪽에 서선돌, 남쪽에 모남돌, 북쪽에 북왕돌이라고 하는 거석을 마치 방사탑의 기능처럼 둬서 수호신의 역할을 하게 하였다. 분명 조상들 중에는 풍수에 정통한 분들이 있어서 혈맥을 보고 저 큰 돌들을 옮겼을 터. 마을의 액운을 막고, 역질을 막아낸다고 믿어왔다. 단순한 암석숭배 신앙으로 바라보기에는 너무도 정겨운 향토애가 느껴지는 것이다.

김형철 이장에게 유수암리가 보유한 가장 큰 자긍심이 무엇인지 묻자 간명하게 대답했다. "물 인심이 좋습니다."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는 유수암샘물을 인근 마을에서 길러 와도 나눠 줄 수 있었던 전통적 가치관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베풀 줄 아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유수암리보다 지대가 낮은 마을에서 수원지로 유수암천의 물을 배관해 써왔던 사실로 볼 때, 그 넉넉한 마음가짐이 양반촌의 지위를 얻고도 남음이 있다. 마을 만들기 사업으로도 엄청난 성과를 내는 마을로 유명하다. 그만큼 마을 발전을 위해 강력한 결속력을 보여주고, 마을공동체의 능력 또한 인정받고 있다.

안타까운 현실은 장기 미집행도로 문제다. 유수암주유소 인근에서부터 산록도로까지 이어지는 낙후된 농로를 확장하기 위한 설계가 2018년에 이뤄졌지만 지금까지 행정기관에서 어떠한 설명도 없다는 것이다. 마을 주민들이 이구동성으로 불만을 표시하는 저변에는 그만큼 기대가 크고 큰 희망과 포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을의 경제적 마인드가 하루가 다르게 진취적인 사업을 성장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욕구에 차 있지만 산록도로와 평화로를 남북으로 이어주는 마을길이 크게 열리지 않고서는 분명한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동안 다양한 방면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계획만 있고 실천이 되지 않는 행정적 현실을 원망할 뿐. 하고 싶고 해야 할 일이 수두룩하게 줄지어 서 있는 역동적인 마을이기에 이 문제는 단순한 숙원사업 정도가 아니라 사활이 걸린 일이라고 했다. 명확한 해답이 있어야 한다.



밭·길·담의 봄
<수채화 79cm×35cm>


오르막 내리막이 많은 동산 진 마을의 특징을 한 화면에 집어넣기 위하여 오래도록 돌아다녔다. 드디어 봄 햇살이 눈부시게 내려오는 이곳을 찾았을 때 밀려오는 희열이야 어찌 말로 모두 표현할 수 있으랴? 말과 글로 아무리 해도 도달할 수 없는 감정을 그림으로 그린다고 하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런 경우에 해당될 것. 밭과 집 사이에 길이 동서로 나있다. 밭과 길 사이는 돌담으로 축대를 쌓아서 서로 공존한다. 밭은 밭의 할 일이 있고 길은 길이 할 일이 있다.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돌담의 일. 그리는 내내 한 땀 한 땀 바느질 하듯 돌담을 그렸다. 돌들이 원근법에 따라 크기를 달리하는 것도 매력이거니와 햇살의 위치에 따라 그 명도가 미묘하게 다른 느낌을 제공하는 유수암리의 정주공간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해 그렸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폭'이라 부르는 넝쿨나무들의 회화적 역할이다. 저들이 없었다면 돌담의 견고성에 의심이 갈 것이요, 더욱 중요한 것은 회화적 관점에서 무미건조했을 것이다. 돌담도 고마워하고 나 또한 엄청나게 고마운 저들이다. 돌담은 엄밀하게 인위적인 존재이거늘 봄에 새순이 돋아나는 다년생 넝쿨나무가 있어서 생명력을 얻는 기분. 가장 감칠맛 나는 흐름은 길가 아래 밭에서 도로로 올라오는 경사진 흙길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농로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노래하는 밭과 길의 교집합을 바라본다. 밭의 색깔이 돌담 그림자와 길게 대비를 이룬다. 햇살이 보여주는 분별력이려니.



流水岩泉 메시지
<수채화 79cm×35cm>


풍경을 그리면서 사실적인 부분을 줄이고 이 장소가 지니고 있는 위상에 더 욕심을 냈다. 마을의 원류이며 조상 대대로 생명수로 여겼던 샘터에 대한 후손들의 자긍심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물이 솟아나는 곳에 길이 3.5m, 폭 1.2m 정도 되는 대석을 덮고 전면에 유수암천(流水岩泉)이라고 새겨져 있다. 정갈하게 가꿔진 전통적인 우물가 주변 담장의 이미지는 사실과 다른 표현주의적인 요소를 투입했다. 샘물 뚜껑이라고 할 수 있는 표지석의 무게감을 증폭시키기 위해 다른 면들은 야릇한 단순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샘물의 흐름은 쉬지 않고 물을 소중하게 담은 돌로 된 구조는 맑은 청록의 신선함을 강조했다. 물과 돌이 이렇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그림이다. 추측하거니와 마을주민 중에 서예 대가께서 쓰신 글씨로 보인다. 돌에 새길 요량으로 쓴 글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어찌 생각하면 저 글씨를 위한 정갈한 분위기를 창출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해야 할 판. 네 글자 중에 특히 감동적으로 들어오는 것은 岩자다. 파자 하면 '산 아래 돌'이다. 돌 石자에서 왼쪽으로 길게 뻗은 획이 마치 바위를 뚫고 힘차게 솟아나는 샘물을 힘주어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니 이곳이 지닌 의미를 저 획 하나의 추상성으로 모두 담아내고도 남는다. 이 풍경을 그리게 된 연유가 저 한 글자에서 얻은 감동이 기폭장치로 작용했기에. 서예가 돌을 만나고, 그 돌이 샘을 덮어 풍경화가 됐다. 흐르는 물처럼 늘 맑은 마을에서.



■기사제보
▷카카오톡 : '한라일보' 또는 '한라일보 뉴스'를 검색해 채널 추가
▷전화 : 064-750-2200 ▷문자 : 010-3337-2531 ▷이메일 : hl@ihalla.com
▶한라일보 유튜브 구독 바로가기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330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