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이웃마을 사람들이 공통적인 평판이 인상적이다. 부지런한 알부자들이 사는 곳. 전통적으로 농업과 축산업을 함께 해온 일 욕심 많은 사람들이기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리라. 조용하고 평온한 느낌의 마을 이미지 속에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생동감이 숨어 있다. 정중동의 심성이 그대로 살아 숨 쉬는 마을이다.
마을 어르신들이 전해주는 설촌 유래는 이렇다. 430여 년 전부터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니 옛날 명월이라는 큰 마을 위쪽 고유지명 중에 '느지리'라는 곳이 있었다. 그 주변을 정주공간으로 삼고 살아가던 마을도 명월리에 포함되어 있다가 1891년경에 구역이 넓고 광범위하여 불편함이 가중되니 분리하였다. 명월리 윗동네라는 뜻으로 쓰던 상명월에서 따와 상명리라고 마을 이름을 정했다고 한다. 마을 번창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큰 하천이 없음에도 현재까지 남아있는 신물, 세시물, 중천이물과 같은 풍부한 수량의 우물들이 있어서 생활용수와 우마에게 물을 먹일 수 있는 자연적 여건이 조성되어 있었다는 것. 그 아름다운 마을이 4·3광풍 속에서 마을 전체가 불타버렸다. 해안가 마을로 이주하여 살다가 돌아와 재건하여 이룩해 낸 조상들의 터전. 곳곳을 다니다 보면 4·3 이전에 주민들이 살았던 집터의 흔적을 발견 할 수가 있다. 가슴이 저며 온다. 취락구조의 원형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지만 작은 밭이 되어버린 집터들, 집을 잃은 올레는 어디로 향하나.
상명리 주민들의 전통적 공동체정신이 강렬한 메시지를 전하며 세상에 등장한 것은 2007년이다. 그 모습은 대문 없는 '정낭마을'. 제주섬 외부에 대한 선망 의식에서 오는 모방과 답습에 탐닉하는 것이 아니라 제주인이 지녀온 마을공동체의 힘에서 브랜드가치를 찾고자 했다. 서로 믿고 살았던 정낭정신의 부활을 주장하며 모든 집에 대문을 없애고 거기에 정낭을 설지한 것이다. 과거의 소중한 정신자산을 복원하여 미래지향적 발전의 토대로 삼겠다는 마인드를 농촌마을에서 당차게 실천하고 나온 것은 획기적 도전이었다. 그 이후 마을 목장 인근 풍력발전 사업을 포함하여 다양하고 진취적인 마을만들기 사업을 추진해오고 있다.
양희찬 이장에게 상명리가 보유하고 있는 가장 큰 자긍심을 묻자 한 마디로 대답하였다. "양반덜입주!"
군더더기 없이 곧바로 튀어나오는 자신감 속에는 다툼이 없이 살아가는 길을 끊임없이 모색하여온 조상들의 실천력이 그대로 녹아있다.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는 양반문화의 장점을 추출하여 살아온 사람들이다. 자기주장을 내세우기보다 이웃이나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될 수 있는 한 자신의 입장을 내색하지 않는 전통이 있었기에 마을공동체가 어떤 가치 있는 지향점을 향하여 나갈 때는 역동적인 에너지원이 된다는 것이다. 조상 대대로 계승되어 온 '겸양의 미덕'이 상명리라고 하는 마을공동체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뜻이며 어떤 도전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신감이다.
섬 제주의 서북쪽 최고의 전망공간을 보유하고 있는 마을이다. 느지리오름 정상 옛 만조봉수대가 있던 곳. 표고 225m, 비고 85m 정도의 오름이므로 아담하기가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으며 접근성이 좋은 전망공간이다. 숲이 이뤄져 있고 풍부한 자생식물들이 제공하는 청량감이 힐링효과까지 선물해주는 곳. 지질학적으로도 용암동굴계를 품고 있는 소중한 자연자원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 오름 정상에 있던 봉수대가 원형이 파손되었지만 복원이 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마을 차원에서 여러 번 행정기관에 공문을 통하여 탄원을 하였지만 감감무소식이라고 하니 그 원인을 추적하여 규명할 필요가 있다. 섬 제주의 서부지역 오름들과 비양도, 멀리 산방산에 이르기까지 시각적 풍요를 파노라마처럼 만끽할 수 있는 귀중한 장소라는 것은 옛 선인들이 긴급한 통신수단으로 봉수를 올리기에 적합한 곳으로 활용했음은 당연한 일. 상명리가 보유한 지역적 특수성을 설명하는 만조봉수대 원형복원이 절실한 현안임을 밝힌다. <시각예술가>
정낭과 돌담의 만남<수채화 79cm×35cm>
도둑 없는 이상사회의 상징이 정낭이다. 양쪽 정주석 두 개엔 각기 구멍이 위 아래로 3개 뚫려 있고 거기에 둥글고 긴 나무를 끼워서 문이라고도 할 수 없는 입구의 기능을 지닌다. 사람은 다닐 수 있으되 마소는 출입이 불가능한 구조다. 이 세계 어디에 내놔도 정신문화자산으로 손색이 없는 시설을 쉽게 이해하는 방법은 역발상이 필요하다. 도둑의 입장에서 보면 명쾌하다. 도둑들은 얼마나 한심한 대문이라고 생각할까? 나무 한 개가 꽂아져 있으면 가까운 곳에 잠시 다녀오겠다는 표시이고, 두 개는 조금 먼 곳, 세 개가 꽂아져 있으면 귀가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겠다는 일정을 도둑에게 아주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으니 말이다. 마음 놓고 털어가도 되는 소중한 시간정보까지 제공하는 정낭.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둑이 드는 일이 없었다. 세상 그 누구도 도둑놈으로 잠정적 예단을 해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의 상징.
불가사의한 일류문화 유산들이 거대한 규모를 과시하지만 이러한 사람들의 신뢰의식을 보여주는 정신적 보물이 있는 지 묻고자 그렸다. 더욱 무섭게 다가오는 것은 흘러간 옛이야기나 사라져버린 역사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이 마을엔 대문이 없이 모든 집에 정낭이 있다는 것이다. 이상사회의 입증근거를 자신감 있게 보여주고 있으니 소름 돋게 아름답다. 차가운 북서풍이 부는 청명하게 맑은 겨울날, 정오 무렵에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찬란함을 뿜어내는 돌들과 나무 그림자들의 하모니가 담채화에 가까운 정결함으로 귀착된다.
황금빛 겨울목장<수채화 79cm×35cm>
하루해가 지려고 한다. 한 해가 저물어 간다. 50만평 마을목장의 겨울은 누렇게 마른 잎들이 펼쳐져 마치 황금목장이라 부르고 싶은 욕구를 발생시키니 땅의 높낮이를 그대로 읽어 내리며 흘러가는 길을 함께 그렸다. 태양의 위치는 모든 사물의 인상을 바꿔서 보여준다. 한 해를 하루처럼 사는 사계절의 끝에서 지는 해가 보여주는 자연의 모습, 그 멜로디가 하늘과 잇닿으려 한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스케치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황소 한 마리는 이 드넓은 공간이 제공하는 어떤 고독감을 대표하는 듯하다. 무슨 생각하지? 상명목장은 上明이라는 한자 뜻 그대로 높고 밝음이 눈부시도록 구현되는 곳이다. 주변의 오름과 자연 그대로의 느낌을 전달하는 모든 요소들이 시각적 심포니오케스트라를 연주하는 웅장한 모습. 오름으로 향하는 것 같은 저 아름다운 곡선길을 따라 무한정 걷고 싶은 마음. 그림의 한계는 일정한 테두리 속에 담아야 하는 부분집합이라는 것이다. 시선을 한바퀴 돌려 왔던 길 다시 되돌아보고 가야 할 길 똑바로 직시하며 파노라마인생을 체험하는 메타버스 세상과도 같다. 360도 회전하며 모든 장면을 그리고 싶은 투철함이 솟아난다. 인상적인 사실은 가을에 누렇게 변하여 마른 풀잎들이 추운 바람을 막아줘서 그 아래 초록빛을 내는 풀들이 돋아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이치이며 인간사의 어떤 단면을 보여주는 겨울목장 메시지다. 해가 저무니 지는 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살았던 풀잎들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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