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명월리의 간이학교였던 명월숙의 교사와 학생들
'교육중심지'자존 지키며 1967년 본교 승격"영세학교 벗어나자" 추진위 조직 모금운동
"상명, 명월, 동명을 중심으로 하여 국민학교를 신설치 못할지언정 한림분교의 설치를 진정하는 바입니다. …아동들은 춘풍추우 엄동설한을 불구하고 한림국민학교까지 통학치 않으면 안되는 형편이나 거리 관계상 보행이 불가능하여 취학하지 못하는 적령 아동이 태반이나 됩니다."
단기 4287년(1954년) 2월 한림읍 명월리, 동명리 주민 50명의 인장이 찍힌 진정서가 '북제주군 한림면 교육위원장'에게 향한다. 명월분교장을 설치해달라는 건의였다.
▶기성회 조직 3일간 40만원 조성
몇차례에 걸친 진정은 이듬해 결실을 거뒀다. 1955년 5월 분교장 설치 인가가 났고 그해 7월 1학급 45명으로 학교가 문을 연다. 명월분교장 개교에 앞서 기성회가 조직됐다. 이들은 3일동안 학교 부지 마련을 위한 기금을 모았고 이 기간에 39만3000원이 걷혔다. 4·3 직후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때였지만 마을에서는 공동 분담 형식으로 부지 조성에 나섰다.
명월리 오행춘(75)씨는 "학교를 세우기 위해 집집마다 돈을 아껴서 내놓았다. 형편에 따라 돼지, 쌀까지 접수했다"고 말했다.
명월초가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은 1958년이다. 차츰차츰 교지를 늘려갔고 1967년에는 본교 승격이 이루어졌다. 본교 승격은 순탄치 않았다. 폐교 당시 원로회장이었던 오관봉(80)씨는 "학구에 속한 일부 마을 주민들이 명월에 아이를 보내지 않고 한림에 통학시키겠다며 명월초등학교 본교 승격을 반대한 일이 있다"고 기억했다. 이같은 어려움에도 지역 주민들은 1993년 한림초로 통폐합될 때까지 학교 시설 확장 등을 위해 갖은 노력을 벌였다.
▲명월리의 대표적 유적인 명월성.
1976년에는 명월초 시설을 확대하기 위해 명월국민학교육성추진위원회가 꾸려진다. 이들은 "교육 평준화를 부르짖는 이때에도 명월초는 발전이 안돼 영세학교를 면치 못하고 있다"며 재일동포는 물론 범학구민 대상으로 모금 운동을 진행해 당시 400만원을 조성해 900여평의 부지를 사들였다. 학교육성추진위원회는 학교운동회 등에 필요한 달리기 100m 코스가 나오지 않아 부지 확장이 불가피하다며 교육당국에 청원서를 내기도 했다.
1977년 처음으로 6학급이 편성됐던 명월초는 1981년 7학급 301명의 학생이 재학하는 등 교세를 키웠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상황이 달라졌다. 1990년 3월 5학급 편성으로 줄어들더니 마지막 졸업식이 치러진 1993년에는 14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것에 그쳤다.
▶"마을 자원가꾸기에 명월리 미래"
이 무렵 분교장 격하가 논의됐다. 명월초 학부모 52명중 분교장 유지를 희망하는 이들은 9명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학력 저하 등을 우려해 한림초 통폐합을 선택했다. 그럼에도 분교장 격하에 대한 지역 주민의 반발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북제주교육청이 해당 학교로 공문을 보내 "일부 주민과 학부모들이 분교장 격하 유보를 요구하기 위해 직접 도교육청을 방문하는 사례가 있어 이에 대한 대책이 요망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현재 한림초 전체 학생은 692명. 이중 옛 명월초 학구의 학생 28명이 통학버스를 이용해 한림초를 오간다. 명함에 '역사문화가 깃들어있는 마을 명월리'란 문구를 새긴 양성찬 명월리장(48)은 "학교는 사라졌지만 명월리의 미래를 키우기 위해서는 명월대, 팽나무 군락 등 산재한 자원들을 활용하기 위한 방안을 찾는 게 아이들을 위한 일"이라며 "팽나무 산책로 조성 등 자구 노력을 벌이고 있다"고 덧붙였다.
향토지 편찬 책임 오용승씨 "명월엔 남다른 교육열"
"조선시대 교육기관인 월계정사에서 지금은 사라진 명월초등학교까지 명월은 제주서부지역의 교육 중심지였다. 오랜 세월 교육기관이 명맥을 이어왔던 것은 마을 사람들의 남다른 교육열에서 비롯되었다."
2000년 한림초등학교에서 퇴임한 오용승(사진·72·명월리)씨. 7·7만벵디유족회장인 그는 '명월향토지'(2003)의 편찬위원장을 맡아 명월리의 역사를 촘촘히 꿰어낸 경험이 있다.
명월리에서 학문이 뛰어난 사람들은 집에 서당을 열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오씨는 대표적 인물로 향교 훈장을 지낸 월헌 오인호 선생을 꼽았다.
"월헌 선생이 명월리 중동 자택에 서당을 열었을 때 한림, 한경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지금까지 원형이 남아있는 명월교는 제자들이 월헌 선생의 공덕을 기려 1931년에 세운 다리로 알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여러사정으로 취학하지 못한 어린이 등을 대상으로 오용범씨(작고)가 간이학교인 명월숙을 개설했다. 4·3의 소용돌이속에 책장을 덮어야 했지만 명월리 사람들은 오랜 열망끝에 명월분교장 개교(1955년), 본교 승격(1967)이라는 성과를 끌어낸다.
1973년 창립한 명월리장학회 대표를 지내며 후배들을 지원했던 오 회장은 "명월초가 폐교된 이후 지금까지도 마을사람들이 기부해 지은 학교를 주민들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며 "명월초를 활용해 마을을 발전시키는 게 주민들의 서운함을 달래는 길"이라고 말했다.
눈부셔라, 햇빛과 바람
갈옷업체 '몽생이' 2000년 정착
제주갈옷 업체 (주)몽생이가 명월초 자리에 둥지를 튼 것은 2000년이다. 양순자 대표(62)는 망설임없이 폐교된 명월초를 사업장으로 선택했다. 한림리 출신으로 일찍이 제주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살았던 그였다.
고향과 가까운 마을인 명월리의 옛 초등학교는 감물염색 작업장으로 맞춤했다. 양 대표는 맨땅이나 다름없던 운동장에 일일이 잔디를 심었다. 수년의 세월을 거치며 고운 초록빛으로 갈아입은 운동장은 갈천을 널따랗게 펴놓고 말리기에 최적이 됐다.
갈천 작업은 햇빛과 바람이 적절히 어울려야 하는 탓에 날씨에 민감해진다. 이 때문에 양 대표는 제주갈옷을 명품으로 키우려면 햇빛과 바람의 역할을 과학적으로 보완할 수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옛 명월초 교정에서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갈천 말리기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진=몽생이 제공
몽생이에서 제작하는 갈천 제품은 양말에서 침구류까지 300종에 이른다. 감즙만이 아니라 제주 자생식물 등 친환경적인 소재를 이용해 다양한 자연의 색깔을 옷감위에 풀어낸다. 특히 몽생이는 송이석을 활용한 염색기술로 주목을 받고 있다.
명월초가 문을 닫은 이후 이곳을 임대해 쓰려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마을에 갖가지 제안이 들어왔지만 명월리에서는 고용창출 등을 기대해 몽생이를 택했다. 양 대표는 "지역의 젊은이들에게 갈옷 제작 기술을 가르치는 등 인재를 양성하고 싶다"며 "몽생이는 마을 사람들에게 늘 열려있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명월리는 지난 5월 감물염색에 쓰이는 토종감나무 9백그루를 심었다. 몽생이의 꿈이 마을과 함께 커가고 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