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칼럼]영화 '군함도'는 현재의 문제다

[한라칼럼]영화 '군함도'는 현재의 문제다
  • 입력 : 2017. 08.15(화) 00:00
  • 이윤형 기자 yhlee@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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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군함도'가 일제강점기의 어두운 역사를 스크린 밖으로 소환했다. 군함도는 불과 6만3000㎡의 작은 섬이다. 원래 이름은 하시마(瑞島). 일본 나가사키 항에서 약 19km 떨어져 있다. 나가사키항 토기와터미널에서 페리호로 40분 정도 가면 닿을 수 있다. 몇 년 전 취재차 이 섬을 찾았을 당시는 일본이 세계유산 등재를 앞둔 시점이었다.

콘크리트 제방으로 둘러싸인 섬은 영락없는 군함이었다. 일명 군함도(군칸지마)라 부르는 이유를 알만했다. 애초 이 섬은 조그만 바위섬에 불과했다. 운명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1810년 무렵, 석탄이 발견되면서부터다. 이후 대표적 전범기업인 미츠비시가 섬을 사들이고, 1890년대 들어 본격 해저탄광 개발이 시작된다. 생산된 석탄은 일본 근대화에, 중일전쟁을 거쳐 태평양전쟁기에는 군수물자를 만드는데 이용됐다.

일제는 집요했다. 더 많은 석탄을 캐기 위해 지속적으로 매립하면서 섬 면적을 늘려나갔다. 처음 남북 320m, 동서 120m 정도 크기에서 현재의 남북 480m, 동서 160m 정도로 확대됐다. 이 좁은 면적에 많을 때는 5300명이나 거주했다. 많은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 고층아파트 등 건물 70여동이 들어섰다. 이미 1916년에 일본 최초의 고층아파트가 이 섬에 지어진 이유다.

전쟁 시기 석탄 생산을 떠받친 것은 대부분 강제징용 노무자들이었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에는 약 800명에 이르는 한인들이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바닷속 1000m까지 내려간 갱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일제의 침략전쟁을 위한 도구로 내몰려 희생됐다. 고통이 오죽 심했으면 '지옥섬'으로 불렀을까. 그럼에도 이러한 아픈 역사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영화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군함도라는 공간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하고 있다. 여기에 영화적 상상력이 버무려졌다. 하지만 영화 '군함도'는 단면일 뿐이다. 태평양전쟁 시기 일제가 저지른 강제노역 현장이 어디 군함도 뿐일까. 일본 각지는 말할 것도 없고 사할린이나 남양군도, 동남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한인들이 끌려가 고통을 겪었다.

제주도에도 강제징용과 노역의 현장은 부지기수다. 태평양전쟁 시기 제주도민과 다른 지방 사람들을 강제 동원하여 비행장과 거대한 지하진지 등을 만들었다. 그 규모와 실상은 놀라울 정도다. 그럼에도 이에 대한 관심은 미흡하기만 하다. 점차 훼손되고 사라질 위험에 처했다. 제주도에 남겨진 태평양전쟁 시기 전쟁유산 현실이 그렇다.

과거의 어두운 역사라고 외면하고 방치하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다. 사람의 기억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침략과 강제동원 현장이 사라진다면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입증하기는 더욱 어려울지도 모른다. 지금도 침략행위를 인정하지 않는 마당에 과거를 반성하고 사과할 필요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일본은 유네스코가 군함도의 세계유산 등재를 조건으로 강제노역을 인정하는 조치를 취하라고 했지만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국제기구와의 약속도 나몰라라 하는 판이다.

'백문불여일견'이라 했다. 백번 들어도 한번 보는 것만 못한 법이다. 보지 않으면 잊혀지는 것은 불문가지다. 아픈 역사현장은 부정적인 역사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할 '부(負)의 유산(Negative heritage)'이다. 그 자체로 중요하다. 영화 '군함도'는 70여 년 전의 아픔을 현실의 문제로 소환했다. 역사적 사실과 영화적 상상력으로. '군함도'의 아픔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진행형일 수밖에 없다.

<이윤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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