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3·1운동 100주년 제주 항일 현장을 가다

[기획] 3·1운동 100주년 제주 항일 현장을 가다
독립운동사에 뚜렷한 족적… 보존·활용은 미흡
  • 입력 : 2019. 01.01(화) 00:00
  • 이윤형 기자 yhlee@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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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에 석축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모습. 이윤형기자

법정사항일운동·조천만세운동·해녀항일운동 손꼽혀
100주년 맞았지만 역사 흔적 상당수 보존·관리 미흡

올해는 일제에 항거하며 독립운동을 벌인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해이다. 제주도에서도 한반도의 다른 지방에 못지않는 가열찬 항일운동이 전개됐다. 무오법정사항일운동, 조천만세운동, 해녀항일운동 등 제주도의 3대 항일운동은 지역사적 항일투쟁의 의미를 넘어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가 있다. 하지만 제주도내 항일운동의 역사적 장소나 흔적들은 상당수가 제대로 보존·관리되지 못하고 있다. 체계적인 학술연구 조명 작업도 미흡하다.

▷제주 3대 항일운동=제주도는 3·1운동 5개월여 전에 이미 대대적인 무장독립운동이 일어난 지역이다. 1918년 10월 7일 서귀포시 도순동 법정사 승려들이 중심이 돼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일어난 법정사 항일운동이 그것이다. 법정사 주지였던 김연일과 방동화 등 승려들을 중심으로 도순리 주민과 인근 하원리·월평리·영남리 등의 주민 700여 명이 참가했다. 항일운동 결과 모두 66명이 일제에 의해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법정사 항일운동은 제주도내 최초이며 최대 규모의 무장항일운동이다. 3·1운동 이전에 제주민에 의한 대규모 무장항일운동이 펼쳐졌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와 중요성이 크다.

해녀항일운동과 관련 구좌읍 하도리 연두망동산에 세워진 기념탑.

조천만세운동은 예전부터 제주의 관문 역할을 했던 조천지역을 중심으로 1919년 3월21일부터 3월24일까지 4차에 걸쳐 일어났다. 조천리 출신 휘문고보 학생이던 김장환이 서울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한 후 귀향하여 삼촌 김시범, 김시은 등 지역 유지들과 만세운동을 결의하면서 시작됐다. 조천만세운동은 함덕·신촌·신흥 등 인근 지역뿐 아니라 서귀포 등지로도 확산됐다. 1920년대 이후 제주 지역에서 전개된 다양한 항일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민족의식을 심어주는 계기가 됐다.

해녀항일운동은 1931~1932년에 걸쳐 구좌, 성산, 우도의 해녀를 중심으로 생존권을 침해하는 일제와 해녀조합에 항거하면서 전개됐다. 해녀가 중심이 돼 일제의 수탈과 식민지 약탈정책에 저항했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해녀항일운동은 문재인 대통령도 특별히 언급할 정도로 주목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1932년 제주 구좌읍에서는 일제의 착취에 맞서 고차동, 김계석, 김옥련, 부덕량, 부춘화 다섯 분의 해녀로 시작된 해녀항일운동이 제주각지 800명으로 확산됐다"며 "3개월 동안 연인원 1만7000명이 238회에 달하는 집회시위에 참여했다. 지금 구좌에는 제주해녀 항일운동기념탑이 세워져 있다"고 말했다.

해녀항일운동과 관련 구좌읍 하도리 연두망동산에 세워진 해녀운동 주역 조형물.

▷항일운동 유적지 실태는=법정사 항일운동과 관련 현재 기념탑과 의열사 등이 조성돼 있다. 하지만 항일운동 발상지는 석축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상태다. 이 터는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61-1호로 지정돼 안내문만 세워져 있을 뿐이다. 석축은 상당부분 허물어지거나 훼손 위협에 있지만 정비사업은 뒷전이다. 이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도순천을 건너야 해서 접근성도 떨어진다. 궂은 날씨에는 아예 이곳을 찾기가 어렵다. 때문에 보행이 가능한 다리를 설치하고, 한라산 둘레길과 연계해서 활용할 수 있도록 방안을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조천만세운동과 관련해서도 미밋동산을 중심으로 기념탑과 항일기념관이 들어서는 등 성역화 사업이 진행됐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14인의 생가터는 2010년 마을 차원에서 표석을 세우는 등 기리고 있지만 한계가 있다. 일부 생가터는 허물어지는 등 날로 훼손되고 있는 실정이다. 마을 곳곳에 조천만세운동과 관련한 유적지와 현장이 많은 만큼 가이드북 등을 제작 활용하는 등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조천만세운동을 주도한 14인의 생가터 가운데 일부는 허물어지는 등 날로 훼손되고 있는 실정이다.

해녀항일운동의 실상도 별반 다르지 않다. 구좌읍 하도리 연두망 동산 기념탑을 중심으로 해녀박물관이 들어서 있을 뿐 주요 장소에는 표석조차 세워져 있지 않다. 구좌읍과 우도면을 중심으로 해녀항일운동이 벌어지면서 유적도 상당히 많은 편이지만 잊혀질 우려를 낳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제주의 해녀들을 일제의 착취에 맞선 여성 독립운동가로 평가하며 그에 맞는 정당한 평가와 합당한 예우를 약속한 바 있다. 앞으로 2년 뒤인 2021년이면 해녀항일운동 90주년이 되는 만큼 지금부터 각계각층이 중지를 모아 준비해 나가야 한다.

제주도 항일운동은 현대사 최대의 비극인 제주4·3을 거치면서 그 의미가 축소돼온 측면이 크다. 관련 유적에 대한 보존·정비는 물론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계승하는 데 있어서 당국의 지원과 관심이 필요하다. 이윤형기자

[전문가 기고] 박찬식 제주학연구센터장 "체계적 학술연구·보전방안 찾아야"

올해는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된다. 1919년 3·1운동은 일제강점기 거족적, 전계층적인 민족의 독립운동이다. 3·1운동은 독립국가의 지향을 봉건왕정이 아닌 민주공화정으로 설정함으로써 1920년대 이후 독립운동의 방향을 새롭게 제시했다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그 결과 같은 해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3·1절 10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제주항일운동에 대한 체계적인 학술연구와 함께 관련 유적에 대한 보전 활용방안이 요구된다.

3·1운동 5개월여 전에 일어난 법정사 항일운동을 비롯 제주에서는 조천만세운동, 해녀항일운동 등이 전개됐다. 제주도에서 일어난 항일운동의 배경에는 식민시대 이전부터 중앙 정부의 수탈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던 제주도민들의 공동체적 정신이 존재한다. 이러한 저항정신은 일제의 식민지 수탈에 맞서는 항일운동의 중요한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속 연구는 여전히 미흡하고 관련 유적지와 현장 등은 제대로 보전·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특히 해녀항일운동에 대해서는 제주의 특수한 해녀와 한국의 민족운동과의 결합을 넘어서서 더욱 보편적인 인식을 확보해 나가려는 연구 노력이 필요하다. 이 지점에서 보편성을 갖는 기억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해녀 및 해녀투쟁의 특수성과 미시사에서 실마리를 찾는 게 올바르다고 생각된다.

또한 법정사 항일운동, 조천만세운동도 그렇지만 구좌읍과 우도면에는 해녀항일운동과 연관된 유적지 등도 산재해 있다. 하지만 아직도 항쟁에 나선 해녀들과 수많은 청년 등 해녀운동 주역의 독립유공자 선정을 비롯 관련 사적지에 대한 고증과 기념표석 설립 등 다양한 기념사업은 미해결 과제로 남아있다.

따라서 일회성 기념행사에 그칠 것이 아니라 앞으로 제주항일운동전반에 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사업계획의 수립과 활용방안을 마련해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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