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제주살이] (55)비발디의 고아 소년소녀 오케스트라

[황학주의 제주살이] (55)비발디의 고아 소년소녀 오케스트라
  • 입력 : 2022. 10.11(화) 00:00
  • 김채현 기자 hakch@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한라일보] 베네치아에서 부친 당신의 편지를 읽고서 전축에 판 하나를 겁니다. 비발디의 '사계' 음률은 십자형으로 배치된 산 마르코 대성당의 돔들 위로 흘러가듯이 오늘은 신촌리 언덕에서 함덕 바닷가 마을까지 퍼져 내려가는 것만 같습니다. 베네치아 출생의 비발디는 바이올린을 들고 대성당 지붕 위에 올라가는 꿈을 꾸곤 했다지요. 신부가 된 비발디가 지금의 메트로폴 호텔 자리에 있던 고아원에서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가르치던 가을 속으로 점점점 나는 빠져듭니다. 가난하지 않았으면 보지 못했을 고운 이파리들, 고아 소년 소녀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때 비발디는 가장 행복했다고 했습니다.

모차렐라 치즈를 굵직하게 썰면서 듣는 '사계'는 지금 다음 계절로 넘어갑니다. 당신이 내게 들려주었지요. 파리나 빈 등지로 악보를 팔기 위해 베네치아를 떠나던 가난한 비발디를 위해 파란 가을 하늘 밑에서 베네치아 소년 소녀들이 축복해 주었고요. 비발디에게 성스러운 존재였던 그 아이들은 말린 토마토를 함께 먹으며 비발디가 주는 선물 봉지를 받곤 했다고요. 제주의 황금빛 저녁, 조천 항구에 저녁배가 들어올 시간입니다. 우리가 주데카 운하로 들어가 예술학교 파티가 기다리고 있는 주데카 섬으로 건너갈 때처럼 노을빛이 기울고 있습니다. 당신은 크고 작은 종과 방울이 울려대는 베네치아의 결혼식이 끝나고 신부가 된 딸과 함께 부도(浮島)의 늙은 도시, 500년 전의 베네치아 색채 속으로 빠져들고 있겠지요. 연붉은 벽돌집과 연노란 낮은 집들 사이, 방향과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물빛을 보며 어떤 추억을 떠올리나요.

우리가 함께 본 제주의 색채들은 베네치아보다 암울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으며, 우미한 베네치안 컬러와는 사뭇 다른, 자기 미모에 어울리는 생기있는 삶을 여전히 살고 있습니다. 베네치아에서 제주까지 비발디를 들으며 다시 한번 다녀가세요. 커다란 냄비 속의 소스를 휘젓고 있는 당신을 위해 유리알 같은 아침은 창가에 치자꽃 향기를 밀어놓고 머뭇거리지 않았나요. 제주에 올 때는 비발디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 있으면 꼭 챙겨오구요.

1741년 빈에서 죽음을 맞은 비발디가 이름도 없는 공동묘지에 묻힌 뒤 185년이 지난 어느 날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방의 한 수도원 창고에서 알려지지 않은 비발디의 악보 14권이 발견되었지요. 협주곡, 오페라, 칸타타, 오라토리오 등 142곡이 들어 있었고 거기에 비발디의 아름다운 생화라고도 해야 할 베네치아 고아 소년소녀들의 사인이 든 카드가 함께 놓여있었다지요. 산타 소피아 부두에서 리알토 다리 근처로 가는 아름다운 곤돌라 뱃길, 오선지 같은 물길의 에메랄드빛 떨림이 '사계'와 함께 나를 달랩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자금자금한 제주의 자연 포구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인>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7932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